삼국사기 권 제1

선찬(宣撰)

신라본기 제1 시조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유리이사금(儒理尼斯今)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지마이사금(祗摩尼斯今)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

혁거세 거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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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始祖)는 성(姓)이 박(朴)씨이고 이름은 혁거세(赫居世)이다. 전한(前漢) 효선제(孝宣帝) 오봉(五鳳) 원년 갑자(甲子 (기원전 57년)) 4월 병진(丙辰) 또는 정월 15일이라고도 하였다에 즉위하여 거서간(居西干)이라 일컬었다. 이때 나이는 13세였고 국호를 서나벌(徐那伐)이라 하였다.

이에 앞서 조선(朝鮮)의 유민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뉘어 살며 6촌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이고, 둘째는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 셋째는 취산진지촌(觜山珍支村) 혹은 간진촌(干[1]珍村)이라고도 하였다. 넷째는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 다섯째는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인데, 이것이 진한 6부(辰韓六部)가 되었다. 고허촌(高墟村)의 촌장 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 옆의 숲 사이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 울고 있었으므로 가서 보니 문득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만 있었다. 그것을 쪼개니 어린아이가 나왔으므로 거두어서 길렀다. 나이가 10여 세에 이르자 남달리 뛰어나고 숙성하였다. 6부 사람들은 그 출생이 신비하고 기이하였으므로 그를 받들어 존경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그를 임금으로 삼았다. 진한 사람들은 박[瓠]을 박(朴)이라 일컬었는데, 처음에 큰 알이 마치 박과 같았던 까닭에 박(朴)을 성으로 삼았다. 거서간(居西干)은 진한의 말로 왕을 뜻한다. 혹은 존귀한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라고도 하였다.

4년(기원전 54년) 여름 4월 초하루 신축(辛丑)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5년(기원전 53년) 봄 정월에 용(龍)이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나 오른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를 낳았다. 어떤 할멈이 보고서 이상히 여겨 거두어 키웠다. 우물의 이름을 따서 그의 이름을 ('알영'이라) 지었는데, 자라면서 덕행과 용모가 뛰어났다. 시조(始祖)가 이를 듣고서 맞아들여 왕비로 삼으니, 행실이 어질고 안에서 보필을 잘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두 성인(二聖)이라 일컬었다.

8년(기원전 50년) 왜인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시조가 거룩한 덕을 지니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 되돌아 갔다.

9년(기원전 49년) 봄 3월에 살별〔星孛〕왕량[2]에 나타났다.

14년(기원전 44년) 여름 4월에 살별〔星孛〕이 삼()에 나타났다.

17년(기원전 41년) 왕이 6부를 두루 돌면서 위무하였는데, 왕비 알영이 따라 갔다. 농사와 누에치기에 힘쓰도록 권장하여 토지의 이로움을 다 얻도록 하였다.

19년(기원전 39년) 봄 정월에 변한[3]이 나라를 바쳐 항복해 왔다. [4]

21년(기원전 37년) 서울〔京〕에 성을 쌓고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이 해에 고구려의 시조 동명(東明)이 왕위에 올랐다.

24년(기원전 34년) 여름 6월 그믐 임신(壬申)에 일식이 있었다.

26년(기원전 32년) 봄 정월 금성에 궁실(宮室)을 지었다.

30년(기원전 28년) 여름 4월 그믐 기해(己亥)에 일식이 있었다. 낙랑인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침범하려다가 밤에도 집의 문을 잠그지 않고, 노적(露積)가리를 들에 그대로 쌓아둔 것을 보고는 서로 말하였다. “이 지방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도(道)가 있는 나라라 할 만하다. 우리들이 몰래 군사를 거느리고 습격한다면 도둑과 다름이 없으니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5]

32년(기원전 26년) 가을 8월 그믐 을묘(乙卯)에 일식이 있었다.

38년(기원전 20년) 봄 2월에 호공(瓠公)을 마한에 보내 예방(禮訪)하였다.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어 말하였다. “진한(辰韓)과 변한(卞韓) 두 나라는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공물(貢物)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이와 같은가?” (호공이)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는 두 성인이 일어나서부터 인사(人事)가 잘 다스려지고 천시(天時)가 순조로와, 창고는 가득 차고 백성은 공경하고 겸양할 줄 압니다. 그래서 진한의 유민으로부터 변한 ‧ 낙랑 ‧ 왜인에 이르기까지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임금님은 겸허하게 신하인 저를 보내 안부를 묻게 하였으니, 예가 지나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크게 노하여 군사로써 위협하니 이것이 무슨 마음입니까?” (마한)왕이 격분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좌우의 신하들이 간언하여 말리니, 이에 돌아갈 것을 허락했다. 이보다 앞서 중국 사람들이 진(秦)나라의 난리를 괴로워하여 동쪽으로 오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 다수가 마한의 동쪽에 터를 잡고 진한 사람들과 더불어 섞여 살았다. 이때 이르러 점점[6] 번성해진 까닭에 마한이 그것을 꺼려서 책망한 것이다. 호공이라는 사람은 그 종족과 성(姓)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본래는 왜인이었다. 처음에 박을 허리에 매고서 바다를 건너온 까닭에 호공(瓠公)이라 불렀다.

39년(기원전 19년) 마한 왕이 죽었다. 어떤 사람이 임금을 달래어 말하였다. “서한(西韓)의 왕이 지난번에 우리의 사신을 욕보였는데 지금 상을 당하였으니 그 나라를 치면 쉽게 평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임금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재난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하고는 따르지 않고,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40년(기원전 18년)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가 왕위에 올랐다.

43년(기원전 15년) 봄 2월 그믐 을유에 일식이 있었다.

53년(기원전 5년) 동옥저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7]필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저희 임금이 남한(南韓)에 성인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8] 신을 보내 (말을) 바치게 하였습니다.”라 하였다.

54년(기원전 4년) 봄 2월 기유(己酉)에 살별이 하고(河鼓)[9][10]에 나타났다.

56년(기원전 2년) 봄 정월 초하루 신축(辛丑)에 일식이 있었다.

59년(서기 2년) 가을 9월 그믐 무신(戊申)에 일식이 있었다.

60년(서기 3년) 가을 9월에 두 마리의 용이 금성의 우물 가운데에서 나타났다.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가 내렸으며 금성 남문에 벼락이 쳤다.

61년(서기 4년) 봄 3월에 거서간이 죽었다. 사릉(蛇[11]陵)에 장사지냈는데, (능은) 담암사(曇[12]巖寺) 북쪽에 있다.

남해 차차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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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차차웅(南解次次雄)이 왕위에 올랐다. 차차웅을 혹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하였다. 김대문이 말하였다. (차차웅은) 방언(方言)에서 무당을 일컫는 말이다.무당은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주관하는 까닭에 세상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공경하여 마침내 큰 어른을 일컬어 자충이라 하였다. 그는 혁거세의 친아들이다. 신체가 장대하고 성품은 침착하고 중후하였으며 지략(智略)이 많았다. 어머니는 알영부인(閼英夫人)이고 왕비는 운제부인(雲帝夫人)이다. 또는 아루(阿婁)부인이라고도 하였다. 아버지를 이어서 즉위하여 원년을 칭하였다.

사론(史論): 임금이 즉위하면 해를 넘겨 원년을 칭하는 것은 그 법이 《춘추》에 상세히 있으니, 이는 고칠 수 없는 선왕(先王)의 법〔典〕이다. (상서) 〈이훈〉(伊訓)편에 ‘성탕(成湯)[13]이 이미 죽었으니 태갑(太[14]甲) 원년이다.’하였고, 정의(正義)에는 '성탕이 이미 죽었으니 그 해가 곧 태갑 원년이다.’라 하였다. 그러나 맹자(孟子)에 ‘탕왕(湯王)이 죽자 태정(太丁)은 즉위하지 않았고, [15]외병(外丙) 2년[16], 중임(仲壬) 4년[17].’이라고 하였으니, 아마 상서(尙書) (이훈)에 몇 글자가 빠져서 정의(正義)의 잘못된 설명이 나온 듯 싶다. 어떤 사람은 "옛날에 임금이 즉위하면 어떤 경우는 달을 넘겨 원년을 칭하기도 하고, 혹은 해를 넘겨 원년을 칭하기도 하였다."고 말한다. 달을 넘기고 원년을 칭한 것은 ‘성탕이 이미 죽었으니 태갑 원년이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맹자에서 '태정이 즉위하지 않았다.'라고 한 것은 태정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음을 일컬음이고, ‘외병(外丙) 2년, 중임(仲壬) 4년.’이라 한 것은 모두 태정(太[18]丁)의 아들인 태갑(太[19]甲)의 두 형이 태어나서 2년 혹은 4년만에 죽었음을 말하는 것이니, 태갑이 탕(湯)을 이을 수 있었던 까닭이다. 사기(史記)에서 문득 중임(仲壬)과 외병(外丙)을 두 임금이라 하였으나 잘못이다. 전자(前者)에 따르면 앞 임금이 죽은 해에 (남해 차차웅이) 즉위하여 원년을 칭하였으니 옳지 않고, 후자에 따르면 곧 상(商)나라 사람의 예법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원년(서기 4) 가을 7월에 낙랑의 군사가 와서 금성을 몇 겹으로 둘러쌌다.[20] 왕이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두 성인이 나라를 버리시고[21] 내가 나라 사람들의 추대로 그릇되이 왕위에 있어, 두려움이 마치 냇물을 건너는 것과 같다. 지금 이웃 나라가 와서 침범하니, 이는 내가 덕이 없는 까닭이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좌우의 신하들이 대답하였다. "적(賊)이 우리가 국상(國喪)을 당하였음을 다행으로 여겨서 망령되게[22] 군사를 이끌고 왔으니 하늘이 반드시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적이 잠시 후에 물러갔다.

3년(서기 6) 봄 정월에 시조묘(始祖廟)를 세웠다. 겨울 10월 초하루 병진(丙辰)에 일식이 있었다.

5년(서기 8) 봄 정월에 왕이 탈해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맏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7년(서기 10) 가을 7월에 탈해대보로 삼아 군무(軍務)와 국정을 맡겼다.

8년(서기 11)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11년(14년) 왜인이 병선 백여 척을 보내 바닷가의 민가를 노략질하였으므로, 6부의 날랜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막았다. 낙랑인이 생각하기를 '나라 안이 비었을 것이다.' 하고 와서[23] 금성을 공격하니 몹시 급박하였다. 밤에 유성(流星)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자 무리들이 두려워하여 물러가 알천(閼川) 가에 진을 치고 돌무더기 20개를 만들어 놓고 갔다. 6부의 군사 1천 명이 그들을 추격하였는데, 토함산 동쪽에서부터 알천에 이르러 돌무더기를 보고서 적의 무리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이에 중지하였다.

13년(16년) 가을 7월 그믐 무자(戊子)[24]에 일식이 있었다.[25]

15년(18년) 서울에 가뭄이 들었다. 가을 7월에 메뚜기떼의 재해가 있어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창고의 곡식을 풀어 그들을 진휼하였다.

16년(19년) 봄 2월에 북명(北溟)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인장을 얻어 (나라에) 바쳤다. [26]

19년(22년) 질병이 크게 번져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겨울 11월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20년(23년) 가을에 금성[太[27]白]이 태미(太[28]微) [별자리]에 들어갔다.

21년(24년) 가을 9월에 누리의 재해가 있었다. 왕이 죽어[薨] 사릉원(蛇陵園) 안에 장사지냈다.

유리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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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이사금(儒理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 남해(南解)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운제부인(雲帝夫人)이고 왕비는 일지(日知) 갈문왕(葛文王)의 딸이다.혹은 왕비의 성은 박씨이고 허루왕(許婁王)의 딸이라고도 하였다. 앞서 남해가 죽자 유리가 마땅히 왕위에 올라야 했는데, 대보(大輔)인 탈해가 본래 덕망이 있었던 까닭에 왕위를 미루어 사양하였다. 탈해가 말하였다. 신기(神器)·대보(大寶)는 용렬(庸劣)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내가 듣건대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齒〕가 많다고 하니 떡을 깨물어서 시험해보자. 유리의 잇금〔齒理〕이 많았으므로 이에 좌우의 신하와 더불어 그를 받들어 세우고 이사금(尼師今)이라 불렀다. 옛부터 전해져오는 것이 이와 같다. 김대문(金大問)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사금은 방언으로 잇금을 일컫는 말이다. 옛날에 남해가 장차 죽을 즈음에 아들 유리와 사위 탈해(脫解)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에 너희 박(朴)·석(昔) 두 성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어라.'라고 하였다. 그 후에 김씨 성이 또한 일어나 3성(三姓)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서로 왕위를 이었던 까닭에 이사금이라 불렀다. 즉위 2년(25년) 봄 2월에 친히 시조묘(始祖廟)에 제사지내고 대사(大赦)하였다.

5년(28년) 겨울 11월에 왕이 나라 안을 순행(巡行)하다가 한 할멈이 굶주리고 얼어서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내가 미미한 몸으로 왕위에 있으면서 백성을 능히 기르지 못하여 늙은이와 어린 아이로 하여금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였으니, 이는 나의 죄이다." (왕이) 옷을 벗어서 덮어주고 밥을 주어 먹게 하였다. 그리고 담당 관청에 명하여 곳곳에 있는 홀아비와 홀어미, 부모없는 아이, 자식 없는 늙은이와 늙고 병들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을 위문하고 양식을 나누어 주어서 부양하게 하였다. 이에 이웃 나라의 백성들이 소문을 듣고 옮겨 오는 자가 많았다. 이 해에 백성의 풍속이 즐겁고 편안하여 비로소 도솔가(兜率歌)를 지었다. 이것이 가악(歌樂)의 시초이다.

9년(32년) 봄에 6부의 이름을 바꾸고 그에 따라 성을 내려주었다. 양산부(楊山部)를 양부(梁部)로 고치고 성은 이(李)로 하였고, 고허부(高墟部)를 사량부(沙梁部)로 고치고 성은 최(崔), 대수부(大樹部)를 점량부(漸梁部) 또는 모량부(牟梁部)라고도 하였다.로 고치고 성은 손(孫), 간진부(干[29]珍部)를 본피부(本彼部)로 고치고 성은 정(鄭), 가리부(加利部)를 한기부(漢祇部)로 고치고 성은 배(裵), 명활부(明活部)를 습비부(習比部)로 고치고 성은 설(薛)로 하였다. 또 관(官)을 설치하였는데, 17등급이 있었다. 첫째는 이벌찬(伊伐飡), 둘째는 이척찬(伊尺飡), 셋째는 잡찬(迊飡), 넷째는 파진찬(波珍飡), 다섯째는 대아찬(大阿飡), 여섯째는 아찬(阿飡), 일곱째는 일길찬(一吉飡), 여덟째는 사찬(沙飡), 아홉째는 급벌찬(級伐飡), 열째는 대나마(大奈麻), 열한째는 나마(奈麻), 열두째는 대사(大舍), 열세째는 소사(小舍), 열네째는 길사(吉士), 열다섯째는 대오(大烏), 열여섯째는 소오(小烏), 열일곱째는 조위(造位)였다. 왕이 6부를 정하고 나서 이를 반씩 둘로 나누어 왕의 딸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부(部) 안의 여자들을 거느리고 무리를 나누어 편을 짜서 가을 7월 16일부터 매일 아침 일찍 큰 부(部)의 뜰에 모여서 길쌈을 하도록 하여 을야(乙夜)에 그치는데, 8월 15일에 이르러 그 공적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진 편은 술과 음식을 차려서 이긴 편에게 사례하였다. 이에 노래와 춤과 온갖 놀이[30]를 모두 행하는데 그것을 가배(嘉俳)라 하였다. 이때 진 편에서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며 탄식해 말하기를 "회소 회소(會蘇)"라고 하였는데, 그 소리가 슬프고도 아름다워 후인(後人)이 그 소리를 따서 노래를 지으니 회소곡(會蘇曲)이라 이름하였다.

11년(34년) 경도(京都)에 땅이 갈라져 샘물이 솟았다. 여름 6월에 홍수가 났다.

13년(36년) 가을 8월에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고 타산성(朶山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14년(37년) 고구려 왕 무휼(無恤)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 나라 사람 5천 명이 와서 투항하였으므로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17년((40년)) 가을 9월에 화려현(華麗縣)과 불내현(不耐縣) 두 현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맥국(貊國)의 우두머리가 곡하(曲河)의 서쪽에서 군사로써 막아 물리쳤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우호를 맺었다.

19년(42년) 가을 8월에 맥국의 우두머리가 사냥하여 얻은 새와 짐승을 바쳤다.

31년(54년) 봄 2월에 살별이 자궁(紫宮)에 나타났다.

즉위 33년(56년) 여름 4월에 용이 금성(金城)의 우물에서 나타났는데, 조금 있다가 폭우가 서북쪽에서부터 몰려왔다. 5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즉위 34년(57년) 가을 9월에 왕이 병환이 들자 신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탈해는 그 신분이 임금의 친척이고 지위가 재상의 자리에 있으며 여러 번 공명(功名)을 드러내었다. 짐(朕)의 두 아들은 재주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내가 죽은 후에 그로 하여금 왕위에 오르게 할 것이니, 나의 유훈을 잊지 말라" 겨울 10월에 왕이 죽어 사릉원(蛇陵園) 안에 장사지냈다.

탈해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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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해 이사금 [탈해를] 또는 토해라고도 하였다.이 왕위에 올랐다. 그때 나이는 62세였다. 성은 석(昔)씨이고 왕비는 아효부인(阿孝夫人)이었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는데, 그 나라는 왜국(倭國)의 동북쪽 1천 리 되는 곳에 있다. 앞서 그 나라 왕이 여국왕(女國王)의 딸을 맞아들여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이 되어 큰 알을 낳았다. 그 왕이 말하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은 것은 상서롭지 못하니 마땅히 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 여자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을 싸서 보물과 함께 궤짝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 가는 대로 가게 맡겨두었다. 처음에 금관국의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금관국 사람들이 그것을 괴이하게 여겨서 거두지 않았다. 다시 진한의 아진포(阿珍浦) 어구에 다다랐다. 이때는 시조 혁거세가 왕위에 오른지 39년 되는 해이다. [31] 그 때 바닷가에 있던 할멈이 줄로 끌어 당겨서 해안에 매어놓고 궤짝을 열어 보니 작은 아기가 하나 있어 그 할멈이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자 신장이 아홉 자나 되고 풍채가 빼어나고 환했으며 지식이 남보다 뛰어났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이 아이의 성씨를 모르니, 처음에 궤짝이 왔을 때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울면서 그것을 따랐으므로 마땅히 작(鵲)에서 (조(鳥)를) 생략하여 석(昔)으로써 성을 삼고, 또 궤짝에 넣어둔 것을 열고 나왔으므로 마땅히 탈해(脫解)라 해야 한다. 탈해는 처음에 고기잡이를 업(業)으로 하여 그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한 번도 게으른 기색이 없었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골상(骨相)이 특이하니 마땅히 학문을 하여 공명을 세워라."고 하였다. 이에 오로지 학문에만 힘써 지리(地理)까지도 겸하여 알았다. 양산 아래 호공(瓠公)의 집을 바라보고는 길지(吉地)라고 여겨 속임수를 써서 그곳을 빼앗아 살았는데, 그 땅은 후에 월성(月城)이 되었다. 남해왕 5년에 이르러 [왕이] 그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고, 7년에는 등용하여 대보(大輔)로 삼아 정치의 일을 맡겼다. 유리왕이 장차 죽을 즈음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왕(先王)이 유언으로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에는 아들이나 사위를 논하지 말고 나이가 많고 또한 어진 사람으로 왕위를 잇게 하라!'고 하셨으므로 내가 먼저 왕위에 올랐다. 이제 마땅히 왕위를 [그에게] 물려주어야겠다.

즉위 2년(58년) 봄 정월에 호공을 대보(大輔)로 삼았다. 2월에 몸소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즉위 3년(59년) 봄 3월에 왕이 토함산에 올라갔는데, 검은 구름이 덮개[蓋]처럼 하여 왕의 머리 위에 떠서 오래 있다가 흩어졌다. 여름 5월에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사신을 교환하였다. 6월에 살별이 천선(天船) [별자리]에 나타났다.

즉위 5년(61년) 가을 8월에 마한의 장군 맹소(孟召)가 복암성(覆巖城)을 들어 항복해 왔다.

즉위 7년(63년) 겨울 10월에 백제 왕이 땅을 넓혀 낭자곡성(娘子谷城)에 이르러, 사자를 보내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가지 않았다.

즉위 8년(64년) 가을 8월에 백제가 군사를 보내 와산성(蛙山城)을 공격하였다. 겨울 10월에 또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하였으므로 왕이 기병 2천 명을 보내 쳐서 쫓아보냈다. 12월에 지진이 일어났고 눈이 내리지 않았다.

즉위 9년(65년) 봄 3월에 왕이 밤에 금성 서쪽의 시림(始林)의 숲에서 닭 우는 소리가 있었다.

파사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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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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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榮·壽 「于」
  2. 왕량(王良)은 별자리 이름이다. 카시오페이아 부근이다.
  3. 변한(弁韓), 또는 변진(弁辰)은 한반도 남부에 있던 삼한의 하나이다. 지금의 경상북도 일부 및 경상남도 지역으로, 남해에 접하고, 서쪽은 마한, 동쪽은 진한에 접해 있었다.
  4. 신채호저, 《조선상고사》<제4편 제4장 3. 신라의 건국>은 이는 당시 신라의 세력에 맞지 않는 황당한 표현이라고 한다. "초년 (初年) 에 초창 (草創) 한 신라는 경주 한 구석에 의거하여 여러나라 중에서 가장 작은 나라였는데 , '변한이 나라로 들어와서 항복하였다.'느니 , `동옥저가 좋은 말 200 마리를 바쳤다.'느니 함이 거의 사세에 맞지 아니할 뿐 아니라 , '북명인(北溟人)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도장을 얻어서 바쳤다.' 함은 더욱 황당한 말인듯하다 ."
  5. 일연(1281), 《삼국유사》 〈권제1〉 낙랑국 條에는 “赫居世三十年 樂浪人來投...” ( 혁거세 30년(기원전 38년)에 낙랑인들이 와서 투항하였고,...)라고 하고 있다.
  6. 三國史節要 ·鑄字本 「寢」. 榮 ·「寢」
  7. 鑄字本 「百」. 榮 ·烈「百」, 燾「十(百)」.
  8. 옥산서원본에는‘問’ 으로 되어 있으나, 三國史節要에 의거 수정하였다.
  9. 原本 「皼」, 「鼓」의 俗字
  10. 하고(河鼓)는 별자리의 이름이다.
  11. 原本 「虵」, 「蛇」의 俗字
  12. 옥산서원본에는 결각(缺刻)되어 있다. 일연(1281), 《삼국유사》 〈권제1〉 신라시조혁거세(新羅始祖赫居世)條 “王升于天[...] 嚴寺北陵是也”(왕이 하늘로 올라가[...] 담엄사 북쪽 릉이 이것이다.) 및 三國史節要에 의거 수정.
  13. 탕(湯, 기원전 1600년경)은 상(商)나라(=殷나라)의 창시자이다. 이름은 리(履)이다.
  14. 原本「大」
  15. 맹자 뿐만 아니라, 사마천도 《사기》에서 마찬가지로 본다. 사마천, 《사기》 〈권3〉 은본기(殷本紀) “湯崩太子太丁未立而卒於是乃立太丁之弟外丙是為帝外丙”(탕이 붕어하였는데 태자 태정(太丁)이 즉위하지 못하고 죽어서 태정의 동생인 외병(外丙)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외병 임금이다.)
  16.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외병은 상나라의 3대 군주이다. 을해(乙亥)년에 즉위하였고 재위에 오른지 2년 만에 사망하였다.
  17.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중임은 상나라의 4대 군주이다. 정축(丁丑)년(을해의 2년 뒤)에 즉위하였고 재위에 오른지 4년 만에 사망하였다.
  18. 原本 「大」
  19. 原本 「大」
  20. 圍. 原本 「國」
  21. 棄. 原本 「弃」
  22. 妄. 原本 「妾」
  23. 옥산서원본에서 ‘求’라 적었으나, ‘來’의 오기로 보인다.
  24. 서기 16년 양력 8월 21일 무자(戊子)일이다.
  25. List of solar eclipses in the 1st century의 일식 자료와 일치한다. 16.9°N 127.1°E (필리핀 부근)에서 일식이 있었다.
  26. 신채호저, 《조선상고사》<제4편 제4장 3. 신라의 건국>은 이는 당시 신라의 세력에 맞지 않는 황당한 표현이라고 한다. "초년 (初年) 에 초창 (草創) 한 신라는 경주 한 구석에 의거하여 여러나라 중에서 가장 작은 나라였는데 , '변한이 나라로 들어와서 항복하였다.'느니 , `동옥저가 좋은 말 200 마리를 바쳤다.'느니 함이 거의 사세에 맞지 아니할 뿐 아니라 , '북명인(北溟人)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도장을 얻어서 바쳤다.' 함은 더욱 황당한 말인듯하다 ." 왜냐하면 북명(北溟)은 '북가시라'--- 북동부여의 별명으로 지금의 만주 훈춘 등지이고, 고구려 대주류왕의 시위장사(待衛壯士) 괴유(怪由)를 장사 지낸 곳인데, 이제 훈춘의 농부가 밭 가운데서 예왕의 도장을 얻어 수천 리를 걸어 경주 한 구석의 조그만 나라인 신라왕에게 바쳤다 함이 어찌 사실다운 말이랴? 이는 경덕왕(景德王)이 동부여 곧 북명의 고적을 지금의 강릉으로 옮긴 뒤에 조작한 황당한 말이니, 다른 것도 거의 믿을 가치가 적음이 그 넷이다."
  27. 原本 「大」
  28. 原本 「大」
  29. 原本 「于」
  30. 原本 「戱」
  31. 이는 곧 기원전 19년인데, 이 기록은 탈해가 왕위에 오른 57년에 그가 62세였다는 같은 책의 기록과 모순된다.
  32. 原本 「㠀」
  33. 原本 「第」
  34. 原本 誤刻
  35. 原本 「夌」
  36. 原本 「凡」
  37. 압독국은 일명 압량소국(押梁小國)이라고도 했는데, 지금의 경북 경산시에 있었던 소국이다. 《삼국유사》에서는 지마 이사금 대(서기 112년~134년)에 가서야 복속된 것으로 되어 있다.
  38. 옥산서원본에는 ‘食’이나 이는 명백히 오자이다.
  39. 原本 「河」
  40. 原本 「他」
  41. 서기 124년 10월 25일 경신(庚申)일이다.
  42. List of solar eclipses in the 2nd century의 일식 자료와 일치한다. 1.6°N 148.3°E (파푸아뉴기니 부근)에서 일식이 있었다.
  43. 장령은 일반명사로서, 위치를 비정하기 어렵다.
  44. 原本「大」
  45. 원본은 ‘秧’(모 앙)이나 이는 명백히 오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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