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본기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제 28대 보장왕 (48)

상 상 2012. 4. 23. 18:43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이 사신으로 왔다가 요동으로부터 돌아가니

황제가 “군대 안은 어떠한가?” 하고 물으므로 [그가] 대답하였다.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예전에 선제께서 죄를 물을 때에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적이 아직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속담에 ‘군대에 중매가 없으면 중도에 돌아온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남생의 형제가 다투어 우리의 길잡이가 되었으므로 적의 진실과 허위를 우리가 모두 알고,

장수는 충성되며 군사는 힘을 다하기 때문에, 신이 ‘반드시 이긴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또 고구려비기(高句麗秘記)에 900년이 되기 전에 마땅히 팔십(八十) 대장이 멸망시킬 것이다.고 하였는데,

고씨(高氏)가 한나라 때부터 나라를 세워 지금 900년이 되었고, 이적의 나이가 80입니다.

 

적은 거듭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빼앗아 팔고, 지진이 나서 땅이 갈라지고, 이리와 여우가 성으로 들어가며,

두더지가 문에 구멍을 뚫고, 인심이 위태하여 놀라니, 이번 걸음으로 다시 거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연남건이 다시 군사 5만 명을 보내 부여성을 구하려고, 이적 등과 설하수(薛賀水)에서 만나 어울려서 싸우다가 패하니

죽은 자가 3만여 명이나 되었다. [이]적이 대행성(大行城)으로 진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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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2. 해설 및 분석:

 

1) 여기에 고구려 건국시기와 관련된 중요한 구절이 있으니, 바로

‘고씨(高氏)가 한나라 때부터 나라를 세워 지금 900년이 되었고,’입니다.

 

고씨란 고구려를 말하고 있고 고구려가 지금 900년이 되었다고 하고 있으니

가언충(賈言忠)이 이 말을 한 때가 668년입니다.

 

따라서 668년으로부터 역산(逆算)하면 서기전 232년이 고구려가 건국된 해입니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 본기를 보면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시기가 한(漢)나라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으로 서기전 37년이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가언충과 삼국사기는 고구려 건국시기에 있어서 약 200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가언충은 고구려가 있었을 당시의 사람이고

삼국사기는 1145년에 완성되었으므로 고구려가 망한 후 약 480년 후의 기록이니 가언충의 말이 보다 정확합니다.

따라서 고구려 건국시기는 서기전 232년이 정확한 것으로 보입니다.

 

※ 오늘 기사와 관련있는 신당서 동이열전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이 군사작전 관계로 [요동(遼東)에서] 돌아왔다.

고종(高宗)이 군중(軍中)의 상황을 물으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지난날 선제(先帝)께서 문죄(問罪)할 적에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오랑캐에게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속담에 ‘군(軍)에 내응(內應)하는 자가 없으면 중도에 돌아서라(군무매軍無媒, 중도회中道回)’고 하였습니다.

오늘 날 남생(男生)의 형제가 집안 싸움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인도하여 주고 있으니, 우리는 오랑캐의 내부사정을 다 알 수 있으며,

장수들은 충성을 다하고 군사들은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臣은 반드시 이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려(高[구,句]麗)의 비기(秘記)에 ‘9백년[註143]이 못되어 80대장에게 멸망한다

(불급구백년不及九百年, 당유팔십대장멸지當有八十大將滅之)’고 하였는데,

 

고씨(高氏)가 한(漢)나라때부터 나라가 있은지 지금 9백년이 되고,

 [이(李)]적(勣)의 나이가 또 80입니다.

 

고구려는 기근(飢饉)이 거듭되어 사람들은 서로 약탈하여다 팔고, 지진(地震)으로 땅이 갈라지며,

낭호(狼狐)가 성중(城中)에 들어가고 두더지가 성문(城門)에 굴을 뚫어, 인심(人心)이 불안에 떨고 있으므로,

이번 걸음에 다시는 출전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남건(男建)이 군사 5만으로 부여(扶餘)[성(城)]을 습격하자,

[이(李)]적(勣)은 살하수(薩賀水) 위에서 그를 쳐부수어 5천급((千級)의 머리를 베고, 3만명을 포로로 사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