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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헌(金命獻, [[1714년]] ~ [[1795년]] [[2월 19일]])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이자 시인이다. 본관은 [[광산 김씨|광산]], 자(字)는 사충(士忠)이다. [[제주도]] 중문 출신.
 
[[과거 시험]]에 10번을 응시하였으나 시험관의 비리로 낙방하였다. [[1795년]](정조 20) [[정조]]의 특명으로 [[어사]] [[심낙수]]가 주관한 향시에특별 제주도시(濟州島試)에 차석으로 입격하여, [[직부전시]]의 명을 받았으나 전령이 도착하기 전에 사망했다. 사망 직후에 급제를 알리는 관원이 도착하여 교지를 관 위에 올려두자, 관이 부르르 떨리고 교지가 땅에 떨어졌다 한다.
 
== 생애 ==
제주도 대정현 중문면 중문리 출신으로, [[고려]] [[충렬왕]]~[[충숙왕]] 때의 재상 문정공 김태현(金台鉉)의 12대손이자 [[충숙왕]]때의 전리판서, 예문관대제학을 지낸 문간공 김광재(金光載)의 차남 윤조(胤祖)의 10대손이다. 할아버지는 여문(汝文)이고, 아버지는 수직통정대부(壽職通政大夫), 절충장군 첨지를 역임한 장집(章緝)이다. 8대조 때 [[제주도]]로 이주해 왔다. [[1730년]]대 [[중문면]] 호근리에서 주승케부락에 살던 제주고씨 집안에 장가가면서 중문면 색달리 지경 주승캐로 이주했다.
 
그는 일찍이 저명한 [[성리학]]자에게 수학했는데, 스승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한성]]에 상경하여 9번을 [[과거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부패한 시험관들의 농간으로 급제는 다른 명문가 자제들에게 돌아갔다. 10번째 과거 시험을 본 뒤 낙방을 예감하여 글을 지어 바치고 귀향하였다. 과거가 끝나자 한 시험관은 한탄하며 이 늙은 선비가 아홉 번을 낙방했으나, 이런 글재주라면 매번 급제했을 것인데도 매번 급제를 빼앗겼다며 탄식했다. 후일 청년들과 창수할 때 이몸은 구구요 과거낙방은 삼삼이라삼삼(年年九九 落第三三)이라 하였다.
 
만년에 둘째 아들이 사는 원동산부락으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냈다. [[1794년]] 성내에 큰 화재가 발행, 집들이 많이 불에 타고 불에 타죽은 사람이 많았다. [[1795년]](정조 20) [[정조]]가 위문차 보낸 [[제주도]] 안핵순무[[어사]](按覈巡撫御史) [[심낙수]](沈樂洙)가 특명으로 주관한 제주도시(濟州島試)에 2등 차석(次席)으로 입격하였다.<ref>1623년(인조 1) [[향시인조]]의 특명으로 제주도 지역에도 특별 향시인 제주도시(次席濟州島試) 2등신설, 차석으로매년 입격하였다거행하였다.</ref> 당시 그의 나이 81세였기에 특별히 급제하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 [[한성]]에 갈 수 없음을 [[심락수]]가 [[정조]]에게 전하니, [[정조]]의 지시로 특별히 [[직부전시]]의 명을 받고 '제주 대정현의 유생 김명헌은 다음 해 급제자로 숙배케 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1795년]](정조 20) [[2월 19일]] 합격 창방이 나오기 직전에 [[과로]]와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평생 소원이던 과거 급제를 못하고 죽는 것을 한탄했다 한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81세였다.
 
== 사후 ==
입관 후, [[1795년]] [[3월]] 특별히 문과 병과의 [[홍패]]교지가 추서되었다. 제주목사를 거쳐 대정현감이 그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늦어졌다 한다. 뒤늦게 [[한성부]]에서 온 전령이 분향 후, 그의 관에 교지를 올리자 관이 부르르 떨리더니 교지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한다. 사연은 후에 전설로 구전하게 되었다. 사후 특명으로 [[증직|증]]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1795년 특별 제주도시에 그가 제출한 답안지는 다른 합격자들의 답안지와 함께 《탐라빈흥록(耽羅賓興錄)》으로 묶여져 인쇄되어 반포되었으며, 후일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입수하였다. 중문동에는 그의 추모비가 세워졌다.
 
== 기타 ==
[[1623년]]부터 실시된 [[제주도]] 지역의 특별 시험인 제주도시 합격자 명단은 《용방록(龍榜錄)》으로 작성되어 실렸다. [[1892년]] [[6월 18일]]에 편찬된 《용방록(龍榜錄)》이 현재 전한다.
 
==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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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정원일기》
* 《일성록》
* 《용방록(龍榜錄)》
* 《탐라빈흥록(耽羅賓興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