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인(王仁, ?~?)은 일본의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백제(百濟)에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는 학자로서, 왜국에 건너가 《천자문》과 《논어》를 전했다고 전하는 인물이다. 근구수왕칙명으로 왕의 손자 진손왕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왕인
王仁
초등대한국사(1908)에 실린, 왕인의 삽화
다른이름와니기시(和邇吉師)
출생미상
사망미상
성별남성
국적백제
별칭와니기시(和邇吉師)
직업학자
칭호가부(歌父)
학문적 활동
분야유학
주요 제자우지노와기 이라쓰코(菟道稚郞子)
오사카부 히라카타시의 왕인묘

《고사기》에는 「와니키시(일본어: 和邇吉師)」[1], 《일본서기》는 「와니(일본어: 王仁)」로 표기되어 있다. 한국의 자료에는 그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데, 중국식의 왕씨 성을 가지고 있는 것에서 당시 고구려(高句麗)에 멸망한 낙랑군(樂浪郡) 계열의 한인(漢人)이 아닐까 추정하는 설도 있으며[2][3], 왕인이 전해준 천자문이, 그 당시에는 성립되지 않았다는 것과 같은 이유로, 사료해석상 그 실재를 의문시하는 설도 있다.

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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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근구수왕 때의 학자로 여겨진다. 일본에서 아라타와케(일본어: 荒田別) 등을 보내어 학자와 서적을 청하자 근구수왕의 명을 받들고 왕의 손자 진손왕[4]과 함께 《논어》 10권,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갔다. 해박한 경서의 지식으로 일본 오진 천황(일본어: 応神天皇))의 신임을 얻어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일본의 문화를 깨우친 그는 물론 그의 자손도 대대로 일본의 서부 고치(河內)에 살면서 학문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왕인은 일본의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5]

일본서기속일본기에 의하면 그는 "할아버지 때에 귀화한 중국인"[6]이라 하지만 왕인이 처음으로 등장한 고사기에는 전혀 없는 내용이다.

역사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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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인에 대한 기술은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 일본서기, 속일본기에 나타난다. 각각의 기술은 다음과 같다.

고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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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기에 따르면 왕인은 백제에서 건너온 현자로 여겨진다.

又, 科賜百濟國, 若有賢人者, 貢上. 故受命以貢上人名, 和邇吉師. 即論語十卷 ・ 千字文一卷, 并十一卷, 付是人即貢進.【此和邇吉師者, 文首等祖】
천황은 또한, 백제국에 "백제에 현자가 있으면 보내라"고 하였다. 이에 그 명을 받아 (백제가) 보낸 사람의 이름이 와니키시(和邇吉師)라 하였다. 《논어》 열 권과 《천자문》 한 권, 모두 11권을 이 사람에게 부쳐 보내왔다.【이 와니키시가 후미노 후비토(文首)의 시조(始祖)이다.】

— 《고사기》 중권(中卷) ・ 오진 천황(応神天皇) 20년 기유

일본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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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왕인은 백제의 학자 아직기(阿直岐, 아치키)의 추천을 받아 오진 천황의 초대를 받아 일본에 건너와 훗날 야마토에 귀화한 학자이다. 왕인이 논어천자문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일본의 학자 중에는 천자문의 성립 연대가 왕인의 일본 방문보다 후대임을 들어 왕인의 실존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또는 일본서기를 편찬했을 때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귀화했던 여러 명의 도래인 학자를 상징적으로 정리한 인물이라는 설도 있다.

속일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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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일본기》에는 왕인의 자손이라는 좌대사(左大史) · 정6위상(上) 후미노이미키 모오토(文忌寸最弟) 등이 자신들의 선조 왕인이 옛 한의 황제의 먼 후손이라고 간무 천황(桓武天皇)에게 주상한 기록이 있다.

(전반부 생략) 最弟等言, 漢高帝之後曰鸞, 鸞之後王狗轉至百濟, 百濟久素王時, 聖朝遣使徴召文人, 久素王即以狗孫王仁貢焉. 是文, 武生等之祖也. 於是最弟及眞象等八人賜姓宿祢.
모오토 등이 말하기를, 한 고제의 후손으로 앵(鸞)이란 자가 있었고, 앵의 후손인 왕구(王狗)가 백제로 옮겨갔는데, 백제의 구소왕(久素王) 때에 성조(聖朝)가 사신을 보내어 문인(文人)을 부르심으로 하여, 구소왕은 곧 구의 손자인 왕인을 바쳤다. 이는 후미(文), 무생(武生) 등의 시조이다. 이에 모오토 및 眞象 등 8인에게 스쿠네(宿祢)의 가바네(姓)을 주었다.

— 《속일본기》 엔랴쿠(延暦) 10년(791년) 4월 무술

이 기술에 따르면 한 고제 즉 유방의 자손으로 「앵(鸞)」이라는 인물이 있었고 그의 자손 「왕구(王狗)」가 백제로 건너와 살았으며 그 손자인 왕인이 왜로 도래하여 후미 씨(文氏)와 무생 씨(武生氏) 등의 선조가 되었다는 것으로(《신찬성씨록》에도 이와 비슷한 기술이 보인다) 왕인은 고구려가 낙랑군을 멸망시킨 뒤 백제에 망명한 중국계 학자가 된다.

다만, 위에 언급된 것들은 한국과 중국의 기록에는 전혀 없는 내용들이며, 왕인이 처음으로 등장했던 이름은 한국어로 「화이(和邇)」였다.[7] 문제는 "화이"는 일본어로 "와니(わに)"로 읽을 수 있지만 "왕인"은 "오오진 (おうじん)" 또는 "오오닌 (おうにん)"으로 밖에 읽을 수 없으며, 고대 일본사에 등장하는 "왕인"을 제외하면 한자인 「왕인(王仁)」을 "와니"로 절대 발음할 수 없다. 즉, "화이"나 "왕인"은 그의 본래 이름이 아니며 이는 "와니"라는 이름을 한자로 재해석한 것으로 추정된다.[8][9] 이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서 본래 "와니"였던 그가 "화이"를 거쳐 "왕인"이 된 후 마치 중국의 왕씨인 것처럼 해석되어 속일본기에 그의 배경 이야기까지 주어진 듯하다.[10] 물론, 이는 왕인이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로 가정했을 때이며, 현대 일본 학자들 사이에서는 「궁월군(弓月君)」, 「아지사주(阿知使主)」를 포함해 당시 고훈 시대를 상징하는 하나의 가상의 인물로 인식된다.

한국에서의 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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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왕인은 고대 일본에 선진 문물을 전수한 백제의 학자로서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는 ‘왕인 박사가 일본에 문화를 전해 주었다’라고 기술되고 있다. 전라남도 영암군에서는 왕인이 태어났다는 집의 터(구림면)를 왕인 박사 유적으로 복원하고 매년 왕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왕인문화축제를 열고 있다.

다만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포함한 한국의 역사서에는 왕인에 해당하는 인물에 대한 기술이 보이지 않고 왕인에 대한 기록은 전적으로 일본의 사서에 의존하므로 왕인 박사 유적지가 왕인의 실제 출생지임을 뒷받침하는 유적이나 추가 사료가 없다는 지적이 있다.

이근우는 6세기 초 일본으로 건너간 왕진이라는 인물을 기초로 2세기 정도 앞선 인물 왕인이 창작되었다는 추정을 하고 있으며, 이런 조작에는 문자 전래시기를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한 고대 일본인들의 의도가 있다는 설을 사료 비판을 통해 제시했다.[11]

고킨와카슈의 가나서(假名序)에 있는 왕인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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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なにはづに さくやこの花 ふゆごもり いまははるべと さくやこのはな

 (나니와즈니 사쿠야 코노하나 후유고모리 이마와 하루베토 사쿠야 코노하나)

  • 나니와 나루에/피는 이 꽃/겨울내 움츠리다/봄볕인가 하고/피는 이 꽃

왕인이 등장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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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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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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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吉師는 백제 인명이나 훌륭한 스승에게 붙이는 일본식 존칭이다.
  2. 전덕재 (2017년 7월). “한국 고대사회 外來人의 존재양태와 사회적 역할”. 《東洋學 第68輯》 (단국대학교). 110면. 2022년 4월 23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3. 이성제. “5호16국·남북조 상쟁기 이주민과 고구려·백제”.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6월 2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4. 진사왕의 아들
  5.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삼국시대 문학의 특성
  6. 손해일 (1997). 《왕인의 달》. 한국문학도서관. 102쪽. 
  7. 「길사(吉師)」는 칭호여서 제외.
  8. 발음은 그대로이지만 한자만 달라진 것이 가장 큰 요소.
  9. "화이"에서 굳이 "왕인"으로 바뀐 이유에 대해서는 아마도 중국의 유교를 공부하는 이로서 조금 더 중국풍의 이름으로 바꾼 듯하다.
  10. 가장 오래된 고사기부터 일본서기, 그리고 가장 최근인 속일본기까지 그에 대한 이야기가 차차 더해진 것. 다만, 모두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나오지 않는 내용들이다.
  11. 이근우. (2004). [역비논단]왕인의 『천자문』·『논어』 일본전수설 재검토. 역사비평, 191-217.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0567747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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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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