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여해
지여해(池汝海, 1591년 7월 12일 ~ 1636년)는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수지(受之)이다. 고려의 명장 충의군(忠義君) 지용기(湧奇)의 8대손이며, 송시열의 외조부이다.[1] 병자호란 때 철산부사(鐵山府使)로서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군사와 싸우다가 순절하여 병조참판 겸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다.
생애
편집사과(司果) 벼슬을 지내고 참판(參判)의 벼슬에 추증된 지경담(池景湛)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나던 날 아버지 지경담에게는 용이 하늘로부터 침실로 날아드는 꿈을 꾼 뒤에 지여해를 낳았다고 한다. 판서(判書) 이기조(李基祚), 감사(監司) 홍명구(洪命耇)와 친분이 있었으며, 계곡(谿谷) 장유(張維 : 인조 때 우의정으로 효종의 장인)와 매우 친하게 지냈다.
무과에 급제하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영변통판으로 300여 군사를 이끌고 운산의 적을 기습, 패주시켜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 전공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라 용천부사가 되었으나 모함하는 자의 참소로 의주의 병력으로 충군(充軍)되었다. 배소에 있을 때 가도에 주둔한 명나라 장수 유흥치(劉興治)의 변란에 백의종군하여 큰 공을 세우고 관직에 복귀하여 장연부사, 철산부사가 되었다.[2]
1636년 병자호란 때 체찰사 김류의 비장으로 출전하여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군의 포위 속에 있자 김류에게 출전을 간청하여 임금의 허락을 받고 어영포수(御營砲手) 200여 명을 이끌고 나아가 싸우다 전원이 전사하였다.[2]
사후
편집패보를 접한 인조는 매우 슬퍼하며 난이 평정된뒤 인조는 백관을 거느리고 지여해의 묘소를 찾아 크게 제사를 베풀고 가선대부 병조 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추증하고 손수 시를 지어 하사하였다. 또한 어명으로 고을 수령(守令)들이 합동으로 크게 제사를 모시게 하고 유림에서도 제사를 모시도록 밭 10결(結:1結은 사방 30보)[출처 필요]을 내리고 정려(旌閭)를 세우게 하였으며 그 자손들은 부역과 방역을 면제시키고 관리로 채용하는 한편 그 지방수령으로 하여금 음식을 공급하게 하여 그 충절을 영원히 이어 기리도록 하였다. 청주 남쪽의 노은동 선영에 이장하였고, 시호는 충장공이다. 외손자는 송시열이다.[2]
1713년(숙종 39)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은행리(銀杏里)에 지여해(池汝海)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충신각이 세워졌다.[4] 충주 지씨와 은진 송씨 안소당공파 문중에서 묘소와 충신각을 관리하고 있다.
같이 보기
편집- 지여해 충신각 - 청주시 향토유적 제34호
가족
편집각주
편집- ↑ 송시열, 국조인물고 권63
- ↑ 가 나 다 http://www.song2979.com.ne.kr/
- ↑ 조선왕조실록, 인조 16권, 5년(1627 정묘 / 명 천계(天啓) 7년) 5월 1일(병인) 6번째기사
- ↑ 두산백과 - 청원 지여해 충신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