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기는 자, 박재현…곽도규를 떠올리다

2024년 11월 박재현의 프로 첫 무대였던 일본 오키나와 마무리캠프. 조재영 코치와 주루 훈련 중인 박재현. /김여울 기자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말은 쉽다.

매일 매일 생존을 위한 싸움을 하는 프로야구 선수들에게는 더 어려운 말이다. 냉정한 프로의 세계에서 그것도 이제 막 프로에 도전하는 신인 선수에게는 불가능한 말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들의 웃음을 보기 전까지는.

KIA 타이거즈 외야수 박재현의 존재감을 확인한 것은 지난 11월 일본 오키나와 마무리캠프에서였다.

키가 큰 낯선 선수는 수비 훈련을 할 때도 달리기를 할 때도 웃고 있었다.

마무리캠프 취재가면 유심히 보는 게 신인 선수들의 태도다.

프로 지명을 받을 정도면 어느 정도 실력은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가지고 있는 것들을 어떻게 프로에서 보여주고, 키우느냐에 따라서 선수들의 끝은 너무나도 다르다.

오랜 시간 ‘새 얼굴’들을 보다 보니 어느 정도 ‘감’이 온다.

캠프 생활을 보면서 “이 선수는 된다”라고 확신이 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좌완 사이드암 곽도규가 그런 케이스였다.

2023 KBO 드래프트에서 KIA 5라운드 지명을 받은 곽도규, 마무리캠프 당시에는 다른 선수에 사람들의 시선이 더 쏠렸었다.

신인들의 불펜 피칭이 있던 날 곽도규가 눈에 띄었다. 공이 아니라 행동과 말에 곽도규를 유심히 지켜보게 됐다.

그리고 “그걸 보셨네요?”라는 곽도규의 말에 속으로 “무조건 된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프로 두 번째 시즌이었던 2024년 가을 한국시리즈를 즐긴 좌완 곽도규. <KIA 타이거즈 제공>

사연은 이랬다. 불펜 피칭을 준비하는 곽도규의 행동이 남달랐다.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어린 선수가 나름의 루틴을 가지고 피칭을 준비하고 있었다.

준비과정에서부터 불펜 피칭까지 모두 지켜본 뒤 곽도규를 인터뷰했다. 기대대로 역시 곽도규는 달랐다.

곽도규는 “오랜만에 피칭을 해서 재미있었습니다”라며 미소를 지었다.

프로에서의 첫 마무리캠프라 모르는 것도 많고 긴장도 될 것인데 곽도규는 “재미있습니다. 몰랐던 것들이 많아서 유익한 시간들이어서 소중히 보내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했다.

어떤 부분을 신경 쓰고 있냐는 질문의 답도 남달랐다.

“곽정철 코치님이 저라는 상품을 어떻게 팔지를 고민하라고 하셨는데, 열심히 팔려고 노력하려고 있습니다. 얘를 쓸만하겠다고 느낄 수 있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준비할 때 루틴이 있는 것 같던데”라는 질문의 답을 들은 뒤 ‘곽도규는 무조건 된다’라고 생각했다.

곽도규는 “원래 저만의 루틴이 있는 편인데”라고 답한 뒤 “그걸 보셨네요?”라며 웃었다.

일단 아마추어 선수가 자신만의 루틴을 가지고 있고, 그걸 첫 프로 캠프에서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다.

또 이런 질문을 할 경우 대부분의 신인 선수는 당황해서 ‘네’, ‘아니오’정도로 답했을 것이다.

오히려 기자에게 질문을 해버린 신인 선수. 그리고 곽도규는 “(루틴이)피해가 되면 버릴 건 당연히 버리고, 지켜나갈 건 지키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말로 다시 한번 ‘합격’을 외치게 했다.

당시 코칭스태프로부터 가장 눈에 띄는 투수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고, 나는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곽도규”를 외쳤다.

그리고 그 곽도규는 지난해 자신의 야구 인생에서 가장 큰 무대였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이의리 세리머니’를 즐기면서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지난해 11월 일본 오키나와 마무리캠프 연습경기에서 좋은 타격으로 눈길을 끌었던 박재현. /김여울 기자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프로 첫 발을 준비한 또 다른 선수, 박재현이었다.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인 것은 아니었다.

마무리캠프에서 이해창 배터리 코치는 “한결같아요. 야구장에서 재미있어하는 게 보여요. 진짜 재미있어 해요. 그냥 맨날 신나있어요”라면서 박재현을 평가했다.

박재현의 이야기도 같았다. 캠프 오니까 재미있다던 박재현은 기대했던 프로 유니폼을 입고 보내는 시간이 그저 행복하다고 했다.

새로운 시작,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게 행복했던 신인은 “알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야구적인 부분이든 생활이든 다 물어보고 배우고 있습니다”라면서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프로 와서 시작이니까 완벽하게 할 생각은 안 하고 있어요. 지금부터 한 단계 한 단계 저한테 미션을 걸고 풀어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잘해야 할 때는 내년 시즌이니까 지금은 만드는 것에 신경 쓰고 있어요.”

뛰어난 컨택 능력을 바탕으로 한 정교한 타격에 “파워도 있습니다”라는 본인피셜 그리고 발까지 엄청 빠르다는 평가에 박재현의 다음 캠프를 기대하고 있었다.

아쉽게도 어바인에서도 오키나와에서도 박재현은 볼 수 없었다.

비시즌에 옆구리 쪽이 좋지 않았고, 구단은 신인의 오버페이스를 막기 위해 1군 캠프 콜업을 하지 않았다.

마무리캠프 때 박재현을 점찍어두었던 이범호 감독이지만 선수와 팀의 미래를 위해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그리고 시범경기와 함께 박재현의 쇼타임이 펼쳐졌다.

“콜업 전화를 받고 떨려서 첫날 왔을 때는 긴장을 많이 했다”던 박재현이지만 이내 1군 그라운드에 적응했다.

2025 시범경기에서 깜짝 스타가 된 박재현. <KIA 타이거즈 제공>

등장과 함께 발 스피드를 보여준 박재현은 폴짝 뛰어서 공을 낚아채기도 했다. 행운의 안타도 만들어냈고, “톱타자로 나서니 더 집중하게 됐어요”라며 3안타 행진도 펼쳤다.

투수 왕국으로 통했던 타이거즈였다. 최근에는 매년 마운드에서 눈길 끄는 신인 선수들이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KIA에 ‘야수 육성’은 남의 팀 이야기 같았다. 특급 FA를 통해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구축해 왔던 KIA 입장에서는 눈길 끄는, 그것도 그라운드를 휘저을 수 있는 발과 끼를 가진 신인 야수의 등장이 반갑다.

김도영으로 열광했던 팬들도 매 타석 기대감을 주는 신인의 등장에 환호하고 있다. 팬들의 환호는 박재현에게는 힘이 나게 하는 무엇이다. 홈에서의 첫 경기에서 박재현은 팬들의 환호를 즐겼다.

“응원 소리가 이 정도로 클 줄은 몰랐는데 양쪽에서 울리니까 심장이 뛰더라고요. 즐겨야죠. 이런 거 즐겨야죠.”

즐기는 박재현이지만 무작정 즐기는 것은 아니다. 신인답지 않은 절제력을 가진 박재현에게는 다 계획이 있다.

“1군이니까 긴장한 티를 내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최대한 티 안 내려고 했어요. 제가 보여줄 수 있는 것까지만 보여주자고 생각하고 보여주려고 했어요. 타격에서는 별 생각 안 하고 ‘중심에 정확히만 맞히자’, ‘내 스윙은 하되 오버는 하지 말자’ 딱 그 정도. 나는 아직 신인이기 때문에 천천히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것 보여주고, 뒤에서 보완할 것 보완해 나가면 될 것 같습니다.”

발이 빨랐지만 힘이 없었던 아이. 박재현은 그래서 자신의 장점을 ‘달리기’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달렸다.

“원래 빨랐어요. 어릴 때는 힘이 없어서 달리기를 하나의 장점이라 생각하고 더 많이 트레이닝도 하고 더 신경 썼던 것 같아요. 뛰는 것은 도영이 형처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가속 구간이 빨라요. 그런데 도영이 형은 뛰는 것만 되는 게 아니라 다 되니까 부러워요.”

KIA 팬들은 며칠 사이 김도영과 박재현이 함께 그라운드를 달리는 순간을 상상하게 됐다.

물론 프로의 벽은 높다. 고졸 신인 첫 시범경기 타격왕으로 등극했던 김도영도 본무대에서는 프로의 쓴맛을 보기도 했다. 그래도 박재현은 2025시즌 KIA 팬들이 가장 주목할 만한 이름이다. ‘즐기는 자’를 향한 기대감으로 새 시즌을 기다리고 있다.
<광주일보 김여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