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오롯한 당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곳, 있나요
[김은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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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만의 집 |
ⓒ 다산책방 |
어떤 책은 세월이 지나도, 시대가 변해도 빛을 잃지 않는다. 오히려 현재의 삶과 너무나 정확히 맞닿아 있어서 읽다보면 경이감이 들기도 한다.
시대 변해도 현재에 쓰인 듯한 책... 왜 진작 전경린을 알지 못했나
전경린 소설의 특징은 '강렬한 이미지'에 있다고 평가된다. 특히 여성적이고 섬세한 문체가 특징이다. 누군가는 전경린 작가를 '대한민국에서 연애소설을 가장 잘 쓰는 작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랑에 대한 감정을 전경린 작가만큼 정확하면서 강렬하게 묘사하는 작가는 없다는 것이 문학계의 통념이다.
그러나 너무 유명해서, 혹은 범접할 수 없는 거장이어서 오히려 피하게 되는 작가가 있다. 가끔은 작가 특유의 색채가 너무 강해서 불편한 나머지 독서 목록에서 제외하는 경우도 있다. 책을 들었다가 "글쎄~" 하면서 슬쩍 내려놓게 되는 작가가 있다. 나에게는 전경린 작가가 그런 작가였다.
개정판으로 출간된 후 우연히 만난 책 <자기만의 집>을 읽은 뒤, 나의 편협함과 무지함을 반성하게 되었다. 왜 진작 전경린 작가의 작품 세계에 빠져들지 못했었는지 후회되고 억울한 마음까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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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필력에 독자들은 감탄을 내뱉게 된다(자료사진). |
ⓒ lucaupper on Unsplash |
기막힌 상황에 어이없어 한 윤선은 다음날 호은, 승지와 함께 전 남편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윤선 못지않게 당혹스러운 마음이 드는 건 호은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다시 생각해도, '어른들은 정말 너무들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동생이라니...., 어른들은 정말 너무들 했다. 엄마의 애인인 아저씨에다, 엄마의 전 남편인 아빠, 내 양육권을 포기한 아빠가 키우는 아빠의 새로운 딸 승지......
도대체 관계 정립이 안되어 어색하게 방황하는 내 정신세계는 안중에도 없이 제멋대로들이다. 겨우겨우 근육을 풀어 엄마의 애인을 받아들였는데, 이번엔 동생이라니.(44쪽)
전 남편이 일하던 곳,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듣고 흔적을 더듬으며 윤선은 깨닫게 된다. '그는 여전히 경제적으로 미자립 상태구나. 승지를 빨리 데려가지는 못하겠구나.' 여자 셋은 '집'이라는 공간으로 돌아와 조금은 불편하지만 은근한 햇살이 비치는 특별한 동거를 시작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윤선과 호은에게 승지는 미움의 대상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 아이의 눈빛이 마음의 벽을 허물어뜨린다. 호은은 승지의 눈을 마주하며 이런 생각을 한다. "기쁠 때면 두 눈 속에 초록빛이 담기는 것도 유전일까? 자주 웃게 해주고 싶은 의욕을 고취시키는 놀라운 미소였다.(70쪽)"라고.
각자의 방식으로 찾는 의미... 웃으면서 삶을 끝낼 수 있다면
그들은 '집'이라는 공간에서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일상을 함께 겪어내며 각자의 방식으로 생의 의미를 찾아 나섰던 것이다. 그래서 승지를 위해 아침상을 차리고, 교복을 맞추러 함께 가고, 백화점에 데리고 가서 옷을 사 입히는 윤선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우린 무언가를 할 때마다 실패를 하고 상처도 입고 후회도 하지. 관계가 잘못되어 마음이 무너지기도 해. 사는 동안 몇 번이고 마음이 무너지지. 하지만 중요한 건 다시 하는 거야.(121쪽)
실패하고 무너지고 상처 입은 후에도 결국 다시 돌아가는 곳은 바로 '집'이다. 물리적인 공간의 집일 수도 있고, 심리적인 공간의 집일 수도 있다.
결국 우리는 '자기만의 집'에서 마음을 추스르고, 받아들이고, 깨닫고, 성장하는 것이다. 저마다 파괴되고 부서지면서도 지킬만큼 소중한 것이 있는 게 삶이었으니까(233쪽) 다시 살아갈 힘을 내야 한다. 윤선, 호은, 승지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최근에 읽은 책 <삶이라는 완벽한 농담>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가끔 사는 것이 농담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도 아주 완벽한 농담. 어떤 일에 한없이 마음을 졸이다가도 지나고서 보면 허허 웃음이 나온다. 웃으면서 삶을 끝낼 수 있다면 우리 모두 인생을 무사히 농담으로 그려내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 각자 인생의 희극 배우들이 아닌가 싶다.'라고.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이 있다.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 없이 각각의 삶의 순간순간 웃음과 눈물이 공존한다. 그러나 비극과 희극은 명확한 경계를 긋기 어려울 만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생을 비극으로 만들 것이냐 희극으로 바꿀 것이냐는 삶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어빠진 레몬을 쓰레기라고 생각할 것이냐, 자연 숙성된 최상의 재료라고 생각할 것이냐는 스스로가 결정할 몫이다.
생은 시어빠진 레몬 따위나 줄 뿐이지만, 나는 그것을 내던지지 않고 레모네이드를 만들 것이다. (278쪽)
소설 <자기만의 집>은 '집'이라는 공간에서 느닷없이 직면한 문제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설계하고 재건축하느냐에 따라 미래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삶을 긍정하는 용기, 세상의 모든 일에 체념하지 않을 용기, 고통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는 책이기도 하다. 우리는 앞으로 어떤 태도로 삶을 살아내야 할지 고민하게 하고 질문하게 하고 위로를 건네는 소설임은 분명하다.
걱정 마, 다른 의미는 없어. 선배가 이 시계를 맡아주면, 나 힘들어도 쓰러지지 않고 해낼 수 있을 거 같다. 국제 어두운 밤하늘 협회의 후원을 받는 작은 별같이 힘껏 반짝일 수 있을 거 같아.(178쪽)
'국제 어두운 밤하늘 협회'처럼 우리를 작은 별처럼 빛나게 해줄 수 있는 후원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삶을 뒤바꿀 수 있게 응원해 주는 따뜻한 존재들이 곁에 있다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놀라운 회복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어쩌면 윤선과 호은과 승지는 서로에게 '국제 어두운 밤하늘 협회' 후원자였을지도 모르겠다.
살다보면 예기치 않은 순간에 다리가 푹 꺾이는 위기와 한계를 경험하게 될 수도 있다. 윤선과 호은과 승지가 그랬던 것처럼, 이 책을 읽은 독자들 모두가 오롯이 '나'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자기만의 집과 자기만의 세계에서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사람들과 함께 서로를 버팀목 삼아 삶을 단단하게 꾸려 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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