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기쁘게 만든 자녀들... 이끼 낀 묘마저 참 소박하다
조선 선비들의 유언을 통해 삶의 지혜와 통찰을 배워보고자 한다. 의로운, 이상적인, 유유자적한, 때론 청빈한 선비들의 유언은 유언에 그치지 않고, 후대 사람들에게는 세상을 살아가는 지침과 삶의 방향을 잡아주는 나침반이 되기도 한다. <기자말>
[이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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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에 있는 도계서원 가는 길. 저수지에서 왼쪽으로 가면 도계 서원이, 오른쪽 구릉으로 올라가면 노계 박인로의 묘소가 나온다. (2025년 2월 촬영) |
ⓒ 이재우 |
<장자>에 '아무것도 없는 무하유 마을에서 노닐다가(而遊無何有之鄉) 사방 끝이 없는 들판에서 쉴 것이다(以處壙埌之野)'라는 말이 나온다. <장자(내편 응제왕)>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鄉)'은 세속에서 벗어난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을 말한다.
여기 한 선비가 있다. 그는 '무하유지향'에서 말을 빌려 스스로를 무하옹(無何翁)이라 불렀다. 그는 <안분음(安分吟)>이란 한시에서 '도천 시냇가에 사는 무하옹(道川川無何翁)/ 가진 건 허물어진 초가삼간 뿐(破屋數間而已矣)'이라며 청빈한 삶을 노래하기도 했다.
이 무하옹은 중년에는 무인으로서 전쟁(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나가 싸웠고, 늙어서는 자연에 소요유(逍遙遊) 하며 살았던 박인로(朴仁老: 1561~1642)다. 가사 11수(태평사, 사제곡, 누항사, 선상탄, 독락당, 영남가, 노계가, 소유정가, 입암별곡, 상사곡, 권주가), 시조 67수, 한시 110수를 남긴 박인로는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 3대 가인(歌人)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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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계문학관은 비교적 최근인 2018년 6월 개관했다. (2025년 2월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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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홍시가> 시비. ‘盤中早紅감이 고와도 보이나다/柚子 아니라도 품은즉도 하다마는/품어가 반길이 옶을새 글로 설워하노라’라고 적혀 있다. (2025년 2월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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盤中早紅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柚子 아니라도 품은즉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이 옶을새 글로 설워하노라
풀이: 소반에 놓인 붉은 감이 곱게도 보이는구나, 비록 유자가 아니라도 품어 갈 마음이 있지마는, 품어가도 반겨줄 부모님이 안 계시니 그것이 서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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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계 박인로 선생을 모신 도계서원 편액. (2025년 2월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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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장현광은 박인로에게 조홍시(다른 감보다 일찍 익은 감)를 소반에 내어 대접했다. 박인로는 감을 보고 어머니를 생각하며 <조홍시가> 첫수를 지었다.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박인로의 회한이 묻어나는 풍수지탄(風樹之嘆)의 심정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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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인로 사후 65년 뒤인 1707년 지역 유림에 의해 도계사 사당을 창건하고 제향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후 1970년 문중과 후손들이 서원을 복원하였다. (2025년 2월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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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배 교수에 따르면, <조홍시가>의 첫수는 장현광, 제2~4수는 이덕형의 청으로 박인로가 지었다고 한다. <조홍시가>의 제2수도 좀 살펴보자.
왕상(王样)의 잉어 잡고 맹종(孟宗)의 죽순 꺾어
검던 머리 희도록 노래자(老萊子)의 옷을 입고
일생에 양지성효(養志誠孝)를 증자(曾子)같이 하리이다
중국 효자 네 명(왕상, 맹종, 노래자, 증자)이 등장하는 데, 그들과 관련된 고사도 전해진다. 왕상(王样)은 겨울에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다 어머니에게 대접했다고 한다. 와빙구리(臥氷求鯉: 얼음 위에 누워 잉어를 구하다) 고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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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청 마루에 <서경>에서 따온 구인당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아홉 길 높이의 산을 쌓는 데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 산을 완성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2025년 2월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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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자(老萊子)는 나이 칠십에 어린아이 옷을 입고 부모를 기쁘게 했다. 희채오친(戲彩娛親)이란 고사는 여기서 나왔다.
증자(曾子)는 이름이 증삼(曾參)으로 공자의 제자이며 교지통심(嚙指痛心: 손가락을 깨무니 가슴 통증을 느끼다) 고사를 탄생시켰다. 교지통심은 설명이 좀 필요할 듯싶다.
청년 증삼이 산에 땔감을 구하러 간 사이 집에 손님이 오자, 당황한 어머니는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효자 아들이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다. 산에서 나무를 하던 증삼은 어머니가 손을 깨물자 가슴 통증을 느꼈다고 한다. 집에 무슨 일이 생겼을 것으로 짐작한 증삼은 서둘러 내려와 손님을 대접했다고 한다.
박인로는 이런 효자들을 시조에 끌어오면서 효를 다하지 못한 스스로를 탓했다. 사후 63년 만에 쓰여진 박인로의 행장(行狀)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공은 어머니에게) 여름이면 잠자리에서 부채질을 해 드리고 겨울이면 제 몸으로 자리를 따뜻하게 덥혀 드렸다. 아침저녁으로 곁에서 모시면서 기쁘고 즐겁게 해 드리고, 병이 나자 걱정으로 어찌할 줄 모르고 눈물을 흘리며 다닐 때에 신발을 제대로 신지 못하였다."
忠孝二字而已矣)"라고 말할 정도로 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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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계서원 옆에 있는 장판고. 한음 이덕형의 증손 이윤문이 1690년(경오년) 영천 군수로 내려와 목판본 <경오본 노계가집>을 간행하기도 했다. 훗날 1831년(순조 31) 동학 창시자 최제우의 아버지 최옥의 주관으로 <노계집>이 편찬되었다고 한다. (2025년 2월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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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로는 무인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 군에 의해 영천 성이 함락되자 별시위(別侍衛)로서 의병장 정세아의 휘하에서 왜적과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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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계문학관 공원 안에 조성된 노계 시비. 박인로는 가사 11수, 시조 67수, 한시 110수를 남겼다. (2025년 2월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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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로는 51세 무렵 이덕형이 은거하고 있던 용진 사제(지금의 양평 양서면)로 찾아가 그곳의 아름다움을 <사제곡(莎堤曲>이라는 가사 작품에 담았다. 둘의 우정은 한음이 죽어서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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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계서원 건너편 구릉에 있는 노계 박인로 선생의 묘소. (2025년 2월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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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안의 인연이 가히 교칠지교(膠漆之交)라 할 만하다. 아교(膠)와 옻칠(漆)을 하면 떨어지지도, 벗겨지지도 않듯이 서로 변치 않는 우정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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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계 박인로의 묘는 초라하고 소박했다. 1832년 <노계집> 초간과 동시에 묘비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2025년 2월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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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앞에서 박인로에게 큰 영향을 미친 여헌 장현광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우리 이웃에 사는 무하옹은 자신을 탓하기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 이제 비록 늙고 또 병들었으나 어찌 그날그날 헛되이 세월을 보내며 초목과 함께 썩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여헌선생속집>
무덤을 내려오니 어디선가 무하옹의 노래가 바람을 타고 저수지 위로 날아 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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