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짧은 소설 한 편 읽고 본론을 시작하겠습니다.
2002년 XX월 OO일, 여의도. 지상파의 한 방송사 로비.
20대 중후반의 남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짙은 색의 양복을 입었다.
모두 왼쪽 가슴에 수험표를 붙였는데 수험표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2003년 아나운서 공채 1차 시험‘
주인공 J는 수험 번호 134번이었다.
아나운서 1차 시험은 ’뉴스 리딩’. 읽기 시험이었고 다섯 명씩 한 조를 이뤄서 시험을 치렀다. 시험장으로 입장하기 전, 미리 원고를 받고 5분가량의 예독의 시간이 주어졌다. A4 용지 한 장에 세 단락의 뉴스 원고가 있었다.
수험생들은 이 원고들 중 하나를 골라서 읽어야 했다.
J는 소리 내어 읽기 전, 쭉 눈으로 원고를 훑었다.
첫 단락은 정치 뉴스였다. 정당과 단체의 이름 그리고 지지율 숫자가 등장했다.
두 번째 단락은 스포츠 뉴스. 수위 타자 경쟁을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두 타자의 타율이 원고 내내 등장했다.
세 번째 단락은 날씨 뉴스였다. 지명이 많이 등장했고, 기온을 숫자로 계속 불러야 했다.
일단 J는 세 번째 기상 원고를 소거했다. 최근 기상 캐스터들이 대부분 여성인 것이 이유였다.
정치 뉴스와 스포츠 뉴스, 뭘 고를 것인가 고민하고 있던 중, 같은 조의 다른 지원자가 소리 내서 읽는 것을 들으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결정했다.
’그래! 스포츠 뉴스다!’
그리고 J도 원고를 소리 내서 읽으면서 원고에 숫자로 되어있는 타율 부분을 빼고 읽었다.
5분가량의 예독시간이 끝나고 같은 조 다섯 명의 지원자들이 스튜디오에 입장했다. 그들은 일렬로 단상에 올랐다.
‘안녕하십니까! 131번 XXX입니다.’
그는 정치 뉴스를 읽었다. 132번은 날씨 뉴스를 골랐다. 이어진 133번 지원자는 스포츠 뉴스를 택해서 읽었다. 시험 원고는 이랬다.
“시즌 막판, 프로야구 수위타자 경쟁이 점입가경입니다.
현재 리그 타격 1위, 이순신은 0.347의 타율을 기록 중이고, 타격 2위, 김유신은 타율이 0.346인데, 두 선수의 격차는 단 0.001에 불과합니다.
아직 두 선수는 각각 세 경기와 다섯 경기를 남겨두고 있어서 누가 타격왕이 될 것인지 야구팬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133번은 뉴스를 읽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133번 OXO입니다.
…… 이순신은 영점삼사칠의 타율을 기록 중이고, …… 김유신은 영점삼사육인데, 두 선수의 격차는 단 영점영영일에 불과합니다.……”
133번은 예독을 할 때도 이렇게 읽었고 이걸 들었기 때문에 J는 자신 있게 스포츠 뉴스 원고를 택했던 거였다.
이제 J의 차례였다.
”안녕하십니까! 134번 J입니다.
……현재 리그 타격 1위, 이순신은 삼할사푼칠리의 타율을 기록 중이고, 타격 2위, 김유신은 타율이 삼할사푼육리인데, 두 선수의 격차는 단 일리에 불과합니다.……“
J가 타율을 숫자가 아닌 '할/푼/리'로 읽자, 133번 지원자의 표정은 완전히 일그러졌다.
'낭패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런 마음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다.
반면 원고를 읽으면서 자신감까지 붙은 J는 낭독이 끝나고 카메라를 향해 여유 있는 미소까지 지을 수 있었다.
며칠 후 발표된 1차 시험 합격자 명단에 당연히 133번 지원자의 이름은 없었다. 같은 조의 지원자 중에서는 134번 J만 살아남았다.
이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그렇지만 진실에 가까운 허구입니다. 이런 일은 아나운서 시험을 볼 때마다 항상 벌어지는 풍경이기 때문입니다.
아나운서 시험에서는 리딩 원고를 선정하면서 꼭 함정을 파 놓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함정이 스포츠 분야의 ‘할 푼 리’고, 정치, 경제 분야에서 ‘%포인트’입니다.
만약 이걸 틀릴 경우 평소 해당 분야의 TV 뉴스를 전혀 보지 않은 사람이 됩니다. TV에서 뉴스를 전달해야 할 사람을 뽑는 시험에서 전혀 뉴스를 보지 않은 사람을 뽑을 리는 없습니다.
저도 아나운서 지망생 시절 시험을 치르면서 이 함정에 걸리는 지망생들 많이 봤고 또 스포츠 방송사의 아나운서가 되고 나서 후배들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이런 함정을 자주 파 놓기도 했습니다. 재밌는 점은 매번 그 함정에 걸리는 사람들이 상당수 나온다는 겁니다. 야구팬들은 상상도 못 하시겠죠?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할푼리'를 그냥 숫자로 읽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이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꼭 할푼리를 써야 맞는 건가?
그럼 할푼리의 사전적 의미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래는 다음 국어사전의 설명입니다.
할 割 의존명사
비율의 단위를 나타내는 말. 1할은 전체 수량의 10분의 1로, 1푼의 열 배이다.
푼 分 의존명사
십진법에서, 백 등분한 것의 비율의 단위를 나타내는 말. 1할(割)의 10분의 1이다.
리 厘 의존명사
십진법에서, 1,000분의 1의 비율 도는 그 단위를 나타내는 말.
그러니까
할은 1의 10분의 1로 0.1
푼은 1의 100분의 1로 0.01
리는 1의 1000분의 1로 0.001
이 말은 이순신의 타율 0.347은 삼할사푼칠리는 그냥 영점삼사칠로 읽어도 맞다는 겁니다.
현대 국어에서 '할푼리'를 단위로 사용하는 분야는 오로지 야구뿐입니다. 과거 금융계에서 쓰는 풍조가 남아 있었다지만 이제는 거의 쓰지 않습니다.
현실이 이런데 왜 야구에서는 할푼리가 굳건히 제 위치를 지키고 있는 걸까요?
최근 축구 중계를 들어보면 ‘헤딩’을 듣기가 어렵습니다. 수많은 캐스터들이 꾸준한 노력을 통해 '헤딩'을 '헤더'로 고치는 데 성공했습니다.
격투기 중계방송도 진일보했습니다. 일본식 표현이었던 ‘하이킥’은 자취를 감췄고 ‘헤드킥’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최근 캐스터들은 ‘미들킥’을 ‘바디킥’으로, ‘로우킥’도 ‘레그킥’과 ‘카프킥’등으로 세분화해서 콜을 합니다. 아마도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이 현시대로 온다면 ‘거침없이 헤드킥’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2005년에 제가 축구 중계방송을 처음 할 때만 하더라도 좀 바꿔보자는 마음으로 ‘헤딩’과 ‘헤더’를 번갈아 사용을 했었는데 헤더를 방송에서 쓸 때마다 ‘잘난 척’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실 샤우팅을 할 때, 지르는 느낌이 헤더보다 헤딩이 나았습니다. 여러분도 질러보세요. 특히 길게 지를 때, ‘헤딩~~~’은 뭔가 지르는 맛이 있는데, ‘헤더~~~’는 잘 안되거든요. 그래서 그냥 저는 잘난 척하냐는 비아냥을 들으면서 선각자의 길을 걷는 대신, 그냥 과거의 관습에 기대기로 했습니다.
제가 격투기 K-1을 중계할 때도 샤우팅을 하는 맛이 ‘하이킥’이 ‘헤드킥’보다 강렬했습니다. 특히 K-1은 입식 타격이었기 때문에 한 방에 KO가 자주 나와서 헤드킥 보다 하이킥을 더 선호했습니다.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 이 용어들을 바꿔 놓은 후배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축구, 격투기 보다 더 극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킨 종목은 동호인이 많은 종목인 당구입니다.
과거 당구용어는 전체가 일본용어였습니다. 동호인들은 다마, 시네루, 오시, 우라, 오마오시, 하꾸, 레지, 기데가시 등을 일상 용어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10여 년 동안 스포츠 채널들에서 당구를 꾸준히 방송하면서 우리말로 바꾼 표현으로 중계를 했고 그러면서 이제는 동호인들도 우리 용어들을 사용하는 긍정적인 효과를 볼 수 있었습니다.
다마 = 당구공
시네루 - 회전
오시 - 밀어치기
히끼 - 당겨치기
우라 - 뒤돌리기
오마오시 - 앞돌리기
하꾸 - 옆돌리기
레지 - 대회전
기데가시 - 빗겨치기
특히 젊은 동호인들은 일본식 표현을 거의 쓰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이 역시 오랜 기간 동안 많은 방송인들의 노력으로 불러온 변화입니다.
‘할푼리’는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일본식 표현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야구 용어로 완전히 굳어진 표현입니다.
위에 한 차례 언급했던 것처럼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일본식 언어인 '할푼리'가 사라졌는데 야구에서만 쓰고 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입니다.
KBO 허구연 총재가 해설위원 시절부터 80년대부터 시작한 꾸준한 노력으로 이제 방송과 언론에서 일본식 표현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80,90년대까지 흔하게 들었던 많은 일본식 용어들을 이제는 들을 수 없습니다.
방어율은 평균자책점이 된 지 오래고, 겟투는 더블 플레이, 포볼은 볼 넷, 랑데부 홈런은 백 투 백 홈런, 데드볼은 몸 맞는 공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할푼리 급 위상을 가지고 있던 직구(스트레이또)도 거의 사장이 되어가는 분위기죠.
그러나 할푼리 만은 굳건합니다. 특히 할(割), 푼(分), 리(厘)에서 우리가 나눌 분 分으로 알고 있는 푼은 오로지 이때만 ‘푼’으로 발음하고 있지만 아무도 왜 푼인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캐스터들이 OPS는 할푼리로 읽지 않고 숫자 그대로 읽습니다. 그 이유는 OPS는 퍼밀(‰)의 단위가 아니라, 퍼밀의 단위인 출루율과 4000분율로 계산한 장타력을 합친 단위라 비율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야구 캐스터들은 모든 비율 스탯과 OPS 등을 차이 없이 그냥 숫자로 읽는 미국의 캐스터들에 비해 매우 엄격합니다.
그래서 듣는 입장에서는 어떤 식으로 읽는가만 확인하면 이 기록이 비율을 나타내는 기록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삼할사푼칠리의 타율은 34.7% 혹은 347‰로, 사할일푼육리의 출루율은 416‰라는 비율 스탯이 되는 거고, OPS가 영점칠오라는 것은 들으면서도 이건 비율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가 있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이는 야구라는 종목명이 일본식 표현인데 완전히 굳어져서 대체할 수 있는 용어를 찾지 못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할푼리는 그냥 숫자로 읽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삼할타자요? 그냥 미국처럼 ‘삼백타자’하면 됩니다. 대체할 수 있는 방안은 찾지 않아서 그렇지 분명히 있습니다.
눈치채지 못하신 분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제가 쓰지 않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투수의 주 손을 뜻하는 '좌완', '우완'입니다.
2010년 경, 좌완, 우완이 일본식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이후 저는 이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과정은 간단했습니다. 그냥 버리면 됐습니다. 또, 왼손 투수, 오른손 투수라는 완벽한 대체 용어가 있었기 때문에 아마 시청하시는 여러분의 입장에서도 이질감이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할푼리의 경우는 좌완, 우완과는 달리 팬들에게 이질감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며칠 후면 개막입니다.
저는 수윈에서 올시즌 개막전을 중계합니다.
그 중계방송에서 저는 아마 타자의 타율을 모조리 할푼리로 타율을 읽을 겁니다.
괜히 잘난 척, 앞서가는 척하면서 선구자가 되는 것은 포기하겠습니다.
그냥 여러분이 편한 또 제가 지난 20년 동안 해왔던 길을 걸을 겁니다.
하지만 기다리고는 있을 겁니다. 뛰어난 후배들이 헤딩을 헤더로, 하이킥을 헤드킥으로 바꿨던 것처럼 뛰어난 후배들이 언젠가 우리 일상생활에서 쓰이고 있는 자연스러운 언어들로 중계 언어를 바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언젠가 0.347을 ‘영점삼사칠’로 읽은 아나운서 지망생 133번 OXO님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SBS스포츠 정우영 캐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