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이렇게 에이스가 되었다. - LG 트윈스 임찬규

고교 랭킹에 없던 투수
15년 전 4월 대통령배 야구대회.
그때까지 랭킹에 없던 한 투수 때문에 프로구단 스카우트들이 술렁거렸습니다. 때마침 저도 그 선수의 경기를 직전에 중계방송했었는데 저 또한 그 투수가 궁금했던 터였습니다. 패스트볼로 타자들을 윽박지르는 스타일의 투구가 아주 매력적인 투수였거든요.
'저런 투수가 전국 랭킹권이 아니라고?'
그렇다고 했습니다. 당시 전국구 에이스는 황금사자기에서 눈도장을 찍었던 왼손투수 Y, 중학시절부터 국가대표로 뛰었던 C, 당시 메이저리그와 계약의 소문이 돌았던 덕수고의 원투펀치, Y의 라이벌로 손꼽혔던 L 등이 있었습니다.

당시 함께 중계를 했던 이효봉 해설위원은 프로구단 스카우트 출신으로 현장에서 스카우트들과 직접 만나서 선수들의 평가와 정보를 수집해 왔는데, 스카우트들이 전해준 정보에 따르면 이 선수가 매우 특이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투수의 특징은 이랬습니다.

“3학년 들어와서 많이 좋아진 투수인데 공이 그렇게 빠르지는 않은가 봐. 130중 반? 어제도 생각보다 안 빨랐다네. 최고가 138 정도. 그런데 이게 아무래도 학생 야구이다 보니까 마운드 위에서 한복판에 기세 좋게 눌러버리니 타자들이 뭔지도 모르고 당하는 것 같아.”(당시는 고교야구 중계방송에서 스피드건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요? 신기하네요.”

그 투수입니다. <사진 - SBS스포츠 박단비 기록원>

그 투수의 팀은 준결승까지 진출했습니다. 대회를 시작할 때만 해도 팀에서도 에이스가 아니었던 그 투수는 이제 팀의 에이스가 되어 있었습니다. 준결승에서도 그는 신들린 듯 던졌습니다.
마치 ‘나는 스트라이크만 던질 거야!’라고 크게 외치듯이 스트라이크존 안으로 빠른 공을 욱여넣었죠. 준결승도 역시나 승리.
경기가 끝나자마자 이효봉 위원은 스카우트들과 만나서 준결승 경기에서의 그 투수의 구속을 체크했습니다.

“우영아. 걔가 대회를 치르면서 매 경기 구속이 늘고 있다네. 오늘은 145까지 나왔다는 거야. 처음에는 자신감 때문에 타자들이 못 치던 거였는데 이제 공이 빨라서 못 치고 있는 거야.”

결승 상대팀은 당시 대통령배 3연패를 노리던 덕수고등학교. 메이저리그의 주목을 받고 있던 고교 최강의 원투펀치 김진영과 한승혁이 버티고 있던 말 그대로 고교 최강팀이었죠. - 이 대회에 한승혁선수는 나오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어린이날 진행된 대통령배 결승 경기는 연장까지 가는 팽팽한 접전이었고 경기 막판은 김진영과 그 투수의 불꽃 튀는 투수전으로 진행이 됐습니다. 결국 박민우(현 NC)의 결승 득점으로 경기가 끝났습니다. 대회 MVP는 대통령배 대회 기간 동안 엄청난 성장을 보여주면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그 투수에게 돌아갔습니다.

잠실 야구장 LG 트윈스 기자실에서 '그 투수'를 만났습니다. <사진 - SBS스포츠 박단비 기록원>

이 정도까지 읽으신 야구팬이라면 이 학교와 그 투수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투수는 LG 트윈스 임찬규, 학교는 휘문 고등학교입니다.
이 대회를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제가 왜 이렇게 자세하게 기억을 하고 있냐고요?
이유가 있습니다.

이 대회, 제44회 대통령배 전국 고교야구 선수권대회는 제게도 매우 특별했던 대회였어요. 정우영이라는 방송인이 스포츠 캐스터가 되고, 8년 만에 처음으로 한 야구 대회의 메인 캐스터 역할을 하게 됐던 대회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대회에서 가장 뛰어났던 임찬규라는 선수의 소식을 이후에도 계속 궁금해했고 뉴스들을 추적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제게 줬던 강렬한 인상 때문이었습니다.
이어진 2010년, 대회 이후에도 임찬규의 성장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교야구 왕중왕전과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시속 150km를 돌파했습니다.
LG 트윈스는 2011 드래프트 전체 2순위 지명권을 임찬규를 위해 사용했습니다. 당연한 결정이었습니다.

2010년을 시작하던 당시 전국 랭킹에도 없던 투수는 전국 랭킹 2위까지 자신의 위상을 끌어올렸습니다.

차근차근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설명하는 임찬규 <사진 - SBS스포츠 박단비 기록원>

그리고 15년이 지났습니다.
살짝 덜 유명했던 고교 시절의 이야기는 지금 처음 접하신 분도 있겠지만, 프로 입단 이후, 임찬규의 이야기는 많은 팬들이 알고 있습니다.

‘강속구를 던지던 루키가 루키 시즌의 전천후 출격 이후 구속을 잃었고, 이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오랜 기간을 보직 없이 떠돌다가 2018년 풀타임 선발 2년 차 만에 규정이닝 투구와 두 자릿수 승수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데 성공, 이후 부침이 있었지만 2023년에는 팀의 우승과 함께, 국내 투수 최다승을 기록하고, 2024년에는 2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를 기록, 2025년에는 시즌 첫 승을 데뷔 15년 만에 첫 완봉승으로 장식했다.’

굳이 챗GPT에게 요약을 명령하지 않아도 야구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팬이라면 이 정도로 임찬규의 지난 15년을 요약할 수 있을 겁니다.

지난 4월 5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잠실야구장에서 당일 웨이트 훈련을 모두 마친 임찬규 선수와 잠실 야구장 내 LG 구단 기자실에서 지난 15년을 잠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굴곡이 컸던 선수 인생에서 그가 직접 꼽은 선수 생활의 전환점은 크게 3군데였어요. 루키시즌이었던 2011년, 다시 올라가지 않던 구속과 싸웠던 2016년 그리고 그 구속을 받아들였던 2023년입니다.

임찬규 선수와 인터뷰 중. <사진 - SBS스포츠 박단비 기록원>

2011년.
“사실 제가 1R 지명자고. 주변의 기대도 컸죠. 그만큼 기회도 많이 받았어요. 그때 19살의 저는 그렇게 오는 기회들을 모두 내가 가서 잡아야 한다고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다들 저를 큰 기대감을 가지고 보고 있으니까. 기회를 다른 사람이 아닌 저에게 주니까 저는 나갈 수밖에 없었죠.”

지금까지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2011년 시즌 막판, 두 번의 선발 등판이었습니다.
“마무리라는 역할을 하면서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그래도 잘 버텨냈다고 생각합니다. SK전 4연속 볼 넷을 기록하고는 사실 힘들기도 했는데 그래도 잘 이겨냈고요. 그런데 제가 지금 와서 돌이켜봐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시즌 막판에 두 번의 선발 등판이었어요. 시즌 중반 이후에는 보직도 정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여기저기 계속 들어갔는데, 시즌 막판에 힘이 거의 다 빠진 상태에서 선발 기회가 왔어요. 제 입장에서는 안 나갈 수가 없잖아요. 남들에게 갈 수도 있는 기회를 저에게 주시는데 나가야죠. 그런데 힘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어요. ”

그렇게 임찬규는 구속을 잃었습니다.
“절치부심했죠. 어떻게 하면 구속을 다시 끌어올릴까 고민하고요. 이후에 10년 가까이는 제 선수 생활이 오로지 구속과의 싸움이었어요.”

잃어버린 구속을 되찾기 위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근육도 키워보고, 예전의 와일드한 투구폼도 해보고 해 볼 거는 다 해봤어요. 생각을 해보세요. 사실 2010년과 2011년의 제 몸과 지금의 제 몸을 보면 분명히 지금의 제 몸이 더 좋을 거예요. 근육량도 많고, 팔꿈치 상태를 포함한 전반적인 컨디셔닝도 지금이 더 좋거든요. 그런데 그 구속은 그때보다 안 나와요.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해볼 거 다 해봤는데도 안 나오니까요.”

임찬규 선수와 인터뷰 중. <사진 - SBS스포츠 박단비 기록원>

2016년과 2023년
임찬규 선수가 말한 2016년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상훈 위원님이 코치(LG 트윈스 피칭 아카데미)로 오셨어요. 한참 제가 구속이랑 싸우고 있을 때 이상훈 코치님이 지금의 구속으로 타자와 싸우는 방법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그리고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했죠. 함께 다양한 시도를 했어요. 팔 각도도 내려보고요. 그러면서 2018년에 첫 10승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두 자릿수 승수를 달성했지만 여전히 구속에 대한 미련은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계속 잃어버린 구속을 찾으려고 노력을 했어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2021년) 147까지 다시 올라가기는 했는데 꾸준하지는 않았고요. FA 재수를 하게 되고, 묘하게 그 시점에 염경엽 감독님이 부임하셨거든요. 염 감독님이 그 미련을 접는데 가장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임찬규 선수가 밝힌 내용은 염경엽 감독이 임찬규 선수의 완봉승 이튿날 직접 기자들 앞에서 이야기했던 그 내용이었습니다.
‘나는 찬규 네가 스피드와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공들을 가진 공들을 잘 활용하면 원하는 스피드의 효과를 낼 수 있다.’

바로 이 조언이 구속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임찬규 선수를 바꿨습니다. 그 해 LG 트윈스는 통합우승을 차지했고, 임찬규는 그 우승의 주역이었죠. FA 재수도 완벽하게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2024년도 임찬규 선수는 두 자릿수 승수 사냥에 성공했습니다.

설명을 참 잘하는 임찬규 선수입니다. <사진 - SBS스포츠 박단비 기록원>

당찬규식 낙관론과 쇼펜하우어의 비관론 그 사이 어딘가
임찬규 선수를 만나기 전, 잠실 야구장의 구내식당에서 차명석 단장과 식사를 했습니다. 차명석 단장과 임찬규 선수는 야구계의 대표적인 티키타카 관계를 형성하고 있죠.
“제가 얼마 전에 선수들한테 ‘트랙맨으로 측정을 했으면 나도 150km 찍히지 않았겠냐?’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찬규가 지 휴대폰에서 제가 예전에 던진 영상을 꺼내서 보여주더라고요. 화면에 찍힌 구속을 크게 소리치면서요.
‘시속 137km!’.
제 영상 휴대폰에 저장하고 다니는 얘예요. 하하하.”

차 단장은 임찬규 선수에게 꼭 하고 싶은 부탁이 있다고 했습니다.
“찬규 정말 좋은 애예요. 밝고, 구김없고, 정말 잘 컸어요. 투수조 후배들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끼치고요. 그래도 저는 정말 찬규가 하나만 좀 안 해줬으면 하는 게 있어요. 후배들한테 책 많이 읽은 척은 안 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말을 할 때마다 책 이야기를 하고 다녀요. 애들이 들으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찬규가 진짜 읽은 줄 알 거 아니예요?” (아시다시피 절반 이상은 농담조의 이야기니 감안해서 읽어주세요.)

이후 이어진 임찬규 선수와의 대화에서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본인의 낙관론에 대해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을 때였죠.

“어린 시절의 저는 당참? 근거 없는 자신감? 이거 하나였어요. 이유는 없어요. 다 잘 될 것 같았어요. 실제로 고교시절에는 특히 2학년 때부터 야구를 할 때도 그랬거든요. 그냥 던지면 던지는 대로 다 잘 될 것 같고, 다 잘됐고요. 프로에 와서도 처음에는 그랬어요. 그때 저 보고 ‘당찬규’라고도 많이 불러주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그런 마음을 가지려고 했는데 현실이 그렇지 않더라고요. 게다가 구속도 떨어졌고요.”

그럼에도 임찬규 특유의 ‘낙관론’은 슬럼프를 극복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낙관론자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쇼펜하우어의 비관론적인 시각도 이해를 하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이제는 무조건적인 낙관론보다는 어떤 현상을 놓고 비판적으로도 바라보는 낙관론자가 됐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현역 스포츠인 중 그 누구와 인터뷰를 해야 ‘쇼펜하우어의 비관론’에 대한 언급을 들을 수 있을까요? 놀랍기도 놀라웠지만 속지 말라는 차명석 단장과의 대화가 떠올라서 그에게 독서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독서량이 많지는 않아요. 하루에 세 네 줄 정도라도 꾸준히 읽으려고 노력해요. 1년으로 치면 한두권 정도 일텐데요. 얕지만 넓은 영역을 알고 싶어합니다.”

데뷔 첫 완봉승의 날, 9회초의 임찬규 선수. 이날 임찬규 선수는 딱 100구를 던졌다. <사진 OSEN>

성장서사의 끝은?
필자는 그의 성장을 봐왔고, 그의 성장과 함께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완봉의 순간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전하는 행운까지 가진 바 있습니다.

저는 임찬규 선수의 완봉승을 통해서 크게 배운 것이 있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어떤 선수를 함부로 재단하고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선수’라는 단어는 ‘사람’으로 바꿔도 의미가 통합니다.
제삼자가 누군가의 한계를 함부로 규정하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겁니다.
당신이 규정하고, 당신이 단정 지은 누군가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떤 것이든 해낼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철들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임찬규 선수는 헤어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철들지 않고 살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꿈꾸고 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지금 임찬규 선수는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요? 혹시 노히트노런? 퍼펙트 게임?

설령 임찬규 선수가 이런 꿈을 꾸고 있다고 해서 이뤄질 수 없는 일이라고 단정을 짓지 말기를 바랍니다.
안 된다고 했던 수많은 일들을 이뤄낸 그니까. 그게 임찬규 선수니까요.

시즌 두 번째 등판이었던 KT 헤이수스와의 맞대결 <사진 OSEN>

<SBS스포츠 정우영 캐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