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 정후 리에게 눈 뜨고 당했다.”

사진=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공식 SNS

깜짝 놀랄 3루 도루

음미할 대목이다. 4회 초였다. 스코어는 아직 0-0이다. (한국시간 6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시애틀 매리너스)

1사 후 타석이다. 관중석이 점점 시끄러워진다. “정후 리, 정후 리” 파도가 점점 커진다.

마치 화답이라도 하는 것 같다. 날렵한 스윙에 2구째가 걸린다. 84.4마일짜리 스플리터다. 먼 쪽 어려운 코스에도 가볍게 반응한다. 강한 타구는 아니다. 그래도 1루수를 따돌리기는 충분하다. 라인 따라 흐르는 2루타다.

진짜 놀라운 일은 이제부터다. 투수 브라이스 밀러가 긴장한다. 2루에 신경을 많이 쓴다. 두리번두리번. 자꾸 주자를 쳐다본다. ‘괜한 짓 하지 마. 견제구 던질 수 있어.’ 마치 그런 메시지 같다.

그리고 포수를 향해 초구를 뿌린다.

그때였다. 주자가 움직인다. 3루를 향해 냅다 달리기 시작한다. 포수가 저격을 시도한다. 하지만 어림도 없다. 공이 도착했을 때는 한참 늦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정후 리는 이미 유니폼의 흙을 털고 있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주자가 아무리 빨라도 그렇다. 3루 도루가 너무 쉽다. MLB 레벨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분명히 뭔가 있다.

느린 화면으로 다시 보자. 투수가 2루 쪽을 몇 번 쳐다본다. 고개가 좌우로 왔다, 갔다. 정확히 두 번째다. 주자가 스타트를 끊는다. 마치 미리 알고 있는 것 같다. ‘이번에는 견제구를 던지지 않는다. 홈에 던지는 타이밍이다.’ 그런 버릇 말이다.

투구 동작 전에 벌써 3루를 향해 스타트하는 이정후의 모습. Mlb.com 캡처

투구 동작 전에 이뤄진 도루 스타트

다시 그 순간을 세분해 보자. 군대에서 하던 제식훈련의 구분 동작 기법이다.

① 투수의 세트 모션 → ② 2루 주자를 향한 두 번의 도리도리 → ③ 잠시 멈춤 → ④ 홈으로 투구 동작

여기서 중요한 지점이 있다. ②와 ③의 사이다. 즉, 이정후의 스타트는 이 순간에 이뤄졌다. 보통은 ④를 확인한 뒤에 출발해야 한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빨랐다. ③에서 ④로 넘어가기 전이다. 그러니까 투구 동작보다 일찍 3루로 출발했다는 뜻이다.

이 정도면 상황 끝이다. 아무리 어깨가 좋은 포수도 소용없다. 속수무책이 된다. 실전과 같은 넉넉한 세이프가 이뤄지기 마련이다.

무슨 얘기냐. 그건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의미다. 저 투수는, 저 대목에서, 저 동작 다음에, 무조건 홈으로 던진다, 견제는 결코 하지 않는다. 그런 확신 아래 펼쳐진 플레이다. 더 쉽게 말하면 이 거다. “저 투수는 (2루 주자) 두 번 도리도리 하고 무조건 홈으로 던진다. 그게 버릇이다.”

사인 파악? 눈썰미? 그건 아니다. 바람의 손자는 그곳에서 루키나 다름없다. 다른 리그(AL)의 투수까지 꼼꼼하게 기억하기는 불가능하다. 게다가 다음 타자(맷 채프먼)에게 초구도 던지기 전이었다.

즉 이날의 플레이는 예습의 결과로 봐야 한다. 상대 투수에 대한 연구를 충실히 한 덕분이다. 스카우트 팀이 미리 나눠준 리포트에 따라 철저히 준비한 것이다.

사진=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공식 SNS

만만치 않은 저지율 40.7%

그의 세리머니에서도 힌트가 있다. 3루에서 세이프된 직후다. 유니폼의 흙을 털어 내기 전이다. 손가락 하나로 벤치의 누군가를 가리킨다. 아마 과외 수업을 도와준, 혹은 사인을 준 코치 누군가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경기 후에 이 장면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전력 분석할 때 가장 중점을 두는 게 상대 선발에 대한 것이다. 오늘도 팀에서 여러 가지 특성을 알려줬다. 첫 번째 타석에서 만나면 직구로 많이 승부하고, 두 번째부터는 변화구로 온다는 데이터를 갖고 있었다.” (이정후)

당연히 도루에 대한 것도 빠지지 않는다.
“코치들과 항상 도루에 대해 많이 얘기한다. 오늘도 게임 전 미팅 때 상대 투수의 습관에 대한 내용을 공부했다. 투구할 때, 견제할 때 습관을 체크하는데, 아까 그 장면에서도 (견제가 아닌) 투구할 때 버릇이 나오길래 바로 뛰었다.” (이정후)

사실 상대 브라이스 밀러는 만만한 투수가 아니다. 공도 좋지만, 주자 견제도 꽤 잘한다. 두 시즌(2023~2024년) 동안 도루 16번을 허용했다. 반면 11번을 잡아냈다. 40.7%면 상당히 괜찮은 저지율이다. 픽오프(견제 아웃)도 2번을 기록했다.

올 시즌에는 이번이 첫 도루 허용이다. 아마 상대 입장에서는 그런 느낌일 것이다. “눈 뜨고 당했다.”

주인공은 으쓱할 만하다. “나 정도면 1년에 30개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코치님들이 힘을 많이 주신다. 열심히 달려보려고 마음먹었다.”

참고로 KBO 시절에는 연평균 10개도 못했다. 7년간 성공시킨 도루는 69개가 전부다.

사진=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공식 SNS

“왜 3번 타자인지 증명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달리기가 아니다. 공부하는 열정이다. 그리고 실전에서 곧바로 실행하는 감각과 적응력이다.

게임 때마다 자료는 엄청나다. 투구, 타격, 수비, 주루…. 전 분야에 걸쳐 상상을 초월한다. 세밀하고, 방대한 양의 데이터가 제공된다. 아마 출력하면 A4용지 수십~수백 페이지 분량일 것이다. 그걸 얼마나 연구하느냐는 각자의 몫일뿐이다.

타격에서도 예습의 효과가 나타난다. 이날 친 3개의 안타가 모두 변화구였다. 그것도 각각 다른 구종을 공략한 것이다.

① 4회 우익선상 2루타 = 84.4마일(135㎞) 스플리터 (브라이스 밀러)
② 6회 우중간 2루타 = 82.5마일(132㎞) 너클 커브 (브라이스 밀러)
③ 7회 좌전 안타 = 95.5마일(154㎞) 싱커 (제시 한)

특히 6회 타석이 눈길을 끈다. 너클 커브를 받아쳐 두 번째 2루타를 만들어낸 장면이다.

당시 볼 카운트는 2-2로 몰려 있었다. 어느 것 하나 노릴 수 없는 상황이다. 빠른 볼과 변화구를 가릴 처지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브라이스 밀러의 주력 구종도 아니다. 그는 포심 위주로 던지는 파워 피처다. 변화구는 주로 싱커, 스플리터, 스위퍼를 섞는다. 너클 커브는 5번째 정도의 레퍼토리다.

그런데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 들어온, 그 공을 완벽하게 받아쳤다. 원 바운드로 담장을 넘어가는 장타였다. 출구속도 104.4마일, 거리 380피트를 날아갔다. 이날 가장 잘 맞은 타구였다.

예습을 통해서 공부한, 그래서 염두에 두고 있던 구질이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결코 반응하기 어려운 공이었다.

밥 멜빈 감독도 칭찬에 침이 마른다. "정후는 매번 타이밍이 좋다.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다. 그는 항상 균형을 이룬다. 당겨 치고, 가운데로 보내고, 반대편(좌중간)으로도 날린다. 투구에 따라 대처가 좋다. 왜 우리 팀 3번 타자인지 입증하고 있다."

정후 리는 이 경기 최고의 선수(The Player of the Game)로 선정됐다.

사진=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공식 S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