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령 동인도 전역
네덜란드령 동인도 전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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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의 일부 | |||||||
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주둔하고 있던 토착민으로 이루어진 네덜란드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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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포르투갈 | 일본 제국 | ||||||
지휘관 | |||||||
헨리 로이즈 파우날 |
데라우치 히사이치 |
네덜란드령 동인도 전역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서 1942년 1월 11일부터 동년 3월 9일까지 벌어진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이다.
개요
[편집]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무수한 섬이 동서로 약 3,0000마일 정도 되는 넓이에 산재해 있으며, 그 가운데에 자바섬만이 비교적 개발되었을 뿐, 대부분의 도서지역은 미개발지대로서 내륙 통로가 거의 없다시피 하였다. 따라서, 항구와 비행장이 있는 중요한 해안도시를 점령한다면 나머지 지역은 저절로 지배될 수 있었다.
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는 하인 텔 폴텐(Hein ter Poorten) 중장 휘하의 약 85,000명의 네덜란드군이 수비하고 있었는데, 중견장교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토착민으로 구성된 부대였으며, 훈련이나 장비의 상태가 모두 열악하였다. 뿐만 아니라 해, 공군이 매우 열세한 네덜란드군으로써 광대한 도서지역을 방어하기란 매우 곤란하였다. 한편 연합군은 1941년 12월 23일, 워싱턴에서 개최된 ARCADIA 회담에서 극동지역연합군의 공동보조를 약정하였으며, 이에 따라 1942년 1월 10일 미, 영, 네덜란드, 오스트레일리아 통합 사령부(ABDA Command; American-British-Dutch-Australian Command)를 자바섬에 설치하고, 사령관에는 북아프리카에서 명성을 떨쳤으나 버마 전역에서 패퇴한 아치볼드 웨이벌 대장을 임명하였다.
연합군의 극동방어전략은 말라야 반도-수마트라-자바-북부 호주를 잇는 "말레이 방벽"을 결사 방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ABDA 통합사령부는 이 임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도 전에 일본군의 조기 침공으로 와해되고 말았고, 다만 추후 이루어진 연합 작전의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 그 의의를 둘 뿐이다.
전투 배경
[편집]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는 연합군이 극동방어전략으로써 결사 방어하고 있는 자바섬을 포함하고 있는 제도로써, 일본군에게 있어 이 지역은 남태평양 침공을 위하여 반드시 점령하여야 할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되었다. 또한 동인도제도의 방어 병력이 수가 8만을 헤아리는 대군이기는 하나 훈련 상태와 장비의 상태가 모두 열악하였고, 대부분의 도서지역이 미개발지역 이었으므로, 일본 대본영은 항구와 비행장이 있는 중요 해안도시를 침공, 점령함으로써 모든 도서지역을 자연스럽게 흡수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경과
[편집]연합군이 ABDA 사령부를 창설하고, 아치볼드 웨이벌 대장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할 즈음부터, 일본군은 이미 예비 작전에 돌입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전쟁기본계획상 말라야와 필리핀으로 진격했던 양개종대가, 자바에서 통합되기로 되어 있었다. 보르네오, 셀레베스, 몰루카, 티모르 등의 중요 해안 도시들을 차례로 점령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군의 신속한 예비작전 돌입
[편집]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군은 전쟁기본계획상 말라야와 필리핀으로 진격했던 양개종대가 자바섬에서 통합하기로 되어 있었다. 일본군은 1월 11일부터 예비작전에 돌입하여, 보르네오-셀레베스-몰루카-티모르 등지의 주요 해안 도시를 상륙, 점령하여 자바의 동쪽을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싱가포르 함락 직전인 2월 14일에는 동인도제도 최대의 유전지대인 수마트라섬의 팔렘방에 공수부대를 투하하여 서측면마저 에워싸기 시작하였다.
연합군 해, 공군의 대패
[편집]연합군은 수차례에 걸친 해전에서 일본 해, 공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당시 세계에서 압도적인 화력을 자랑하던 일본 해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고, 2월 27일에 일어난 자바 해전에서 대패하여 연합군 해, 공군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서 사실상 전멸하였다. 이에 제공권과 제해권을 완전 장악한 일본군은 그동안 점령한 전진기지로부터 자바섬을 3면으로 완전히 포위할 수 있게 되었다.
연합군 패배의 원인
[편집]일본군은 작전기간 중 특이한 전술개념을 적용하였다. 그것이 바로 "와조전술"인데, 이 전술은 주로 민다나오로부터 보르네오와 셀레베스로 향한 이토 소장의 동부분견대가 수행한 것이다. 내륙통로가 거의 없는 도서작전에서 기지 건설에 필요한 지역만을 육, 해, 공의 합동 하에 점령하고, 기타 지역은 그냥 건너 뜀으로써 단기간 내에 기지를 추진시키는 전술이었다. 그 구체적인 전술의 과정은 아래와 같다.
- 공격기지에서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한다.
- 목표지역을 공군과 해군을 이용해 공중과 해상으로부터 공격한다.
- 지상군을 투입시켜 국지를 점령하고 비행장을 건설한다.
- 항공기를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발진시킬 수 있게 하고, 국지적인 제공권 및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다.
- 다음 목표에 대하여 공중 및 해상 공격을 실시하고, 이 때 지상군은 보급과 재편성을 실시한다.
위와 같은 과정을 순환적으로 반복하며, 특별히 다른 곳에 비해 방비가 강하다고 판단되는 곳을 점령함으로써, 나머지 지역을 자연스럽게 제압한다는 것이, 와조전술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다.
참고 문헌
[편집]- Morison, Samuel Eliot (1948). 《The Rising Sun in the Pacific; 1931–April 1942》. History of United States Naval Operations in World War II. Boston: Little, Brown and Company. OCLC 7361008.
- Peter Post, William H. Frederick, Iris Heidebrinki and Shigeru Sato, 편집. (2010). 〈The War in the Pacific〉. 《The Encyclopedia of Indonesia in the Pacific War》. Leiden: BRILL. ISBN 90041686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