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마산 의거
3·15 마산 의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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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의 일부 | |||
날짜 | 1960년 3월 15일 ~ 4월 11일 (마산 지역) 4월 11일 ~ 4월 26일 (전국적 확산) | ||
지역 | 대한민국 경상남도 마산시(현 창원시) | ||
원인 | 3·15 부정선거 | ||
목적 |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 | ||
종류 | 항의, 시위 | ||
결과 | 4·19 혁명으로 확대 | ||
시위 당사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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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인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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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자 | |||
사망자수 | 13명 | ||
부상자수 | 870명 |
3·15 마산 의거(三一五馬山義擧)는 1960년 3월 15일 대한민국 경상남도 마산시(현 창원시)에서 3·15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로 일어난 시위이며, 이승만 정부의 부정선거 행위에해 대항해 의롭게 거사를 했다는 뜻에서 3·15 의거라고도 부르며, 정부에서 기념하는 정식명칭이다.[1] 3·15 마산 의거는 4·19 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3월 9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3.15 의거를 국가기념일로 정하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 일부 개정령안'을 의결하고, 3월 12일에 공포하였다.[2]
개요
[편집]1960년 3월 15일 마산시의 민주당 간부들은 경찰의 제지를 뚫고 투표소 안으로 들어가 40% 사전투표와 3인조 공개투표를 비롯한 자유당의 부정 선거 현장을 확인했다. 이들은 당사로 돌아와 10시30분에 선거 포기를 선언했으며, 이내 시위를 준비했다.[3] 민주당 의원 정남규를 중심으로 한 당 간부들이 앞장섰고, 저녁 7시 30분경 1000여 명의 마산 시민이 민주당 마산시당사 앞에 모였다. 민주당 간부와 시민, 학생으로 이루어진 시위대가 행진해 감에 따라 수천 명이 합류하였다. 경찰이 정남규 등 당 간부들을 연행하면서 강력히 대응하자 오히려 시위 군중은 더욱 늘어나 밤 8~9시경에는 만여 명이 넘었다. 이때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 중 정전되자 경찰은 시위대에 총격을 가했는데, 경찰의 발포는 시위대를 더욱 분노시켜 경찰에 돌을 던지며 맞섰다. 시위대는 경찰의 총격에 쫓기면서도 자유당 당사, 서울신문 지국, 국민회, 남성로 파출소, 자유당 의원 허윤수의 집[4], 파출소장의 집 등을 부수었다. 허윤수는 민주당으로 출마하여 당선된 뒤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겨 시민들로부터 "변절자"로 낙인이 찍혔을 뿐만 아니라 경찰 책임자에게 강경 진압을 요구했다는 소문이 난 인물이다.[5] 이날 경찰의 발포로 7명이 사망하고, 870명이 부상당했다.[6] 또한, 1960년 전라북도 남원 금지중학교를 졸업하여 그 해에 마산상업고등학교로 입학을 한 지 얼마 안 되어 시위에 참가했던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4월 11일 아침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것이 발견되면서 시위는 더욱 격화되었고, 이후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되어 4·19 혁명을 촉발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전라남도 광주시에서는 투표소에서 부정표를 발견한 한 시민이 선관위에 항의하자 정치 깡패가 무자비하게 폭행한 것이 발단으로 시민 1천여 명이 낮 12시 45분부터 금남로에 모여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를 벌였다.[7]
사망자
[편집]김주열:3월15일 시위도중 실종되어 실종된지 27일만에 경찰이쏜 최루탄이 눈에 박힌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김용실:3월15일 마산파출소앞 시위중 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
오성원:3월15일 마산파출소앞 시위중 가슴에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
김영준: 시위중 총을맞고 병원으로 후송됐으나 마지막까지 어머니를 부르다 숨졌다고 한다.
김동섭: 오후9시 시위중 총을맞고 병원치료를 받았으나 숨졌다. 당시 후두부에 총알이 관통했었다고 한다.
조현대: 시위중 총에맞아 투병생활을 하다 이듬해 2월28일 숨졌다.
김상웅: 시위중 좌측복부에 총을 맞고 숨짐 죽기전 '내할짓을하고 죽는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쇼'라고 어머니를 위로함
전의규: 시위중 귀윗부분에 총을맞아 사망하였다
김효덕: 시위중 좌측두부에 총을 맞아 사망했다.
김용기: 시위중 총을맞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숨졌다.
김영호:시위중 머리에 총알이 관통해 숨졌다.
이 3.15의거 당시 희생된 사람들은 대부분 현장에서 즉사하거나 병원으로 후송되어 사망했다. 그중 후두부에 총을맞은 김동섭씨가 1963년 까지 생존한걸 보면 다른희생자보다 3년 동안 생존했다는걸 알수있다
수습
[편집]국회조사단은 이날의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총격이 시위대의 해산이 아닌 살상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밝혀냈다. 하지만, 정작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마산 시위가 공산당이 사주해서 벌어진 일인 양 주장하였다.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은 정치부 기자들과의 회견 자리에서 마산 시민들에 대한 정부의 강경 대응을 따져 묻자, "총은 쏘라고 준 것 아닙니까?"라고 대답했다.[8]
총을 줄 때는 쏘라고 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은 아니다.
— 1960년 3월 18일 3.15 마산 발포 사건에 대한 회견 中 이기붕[9]
국립 묘지 조성
[편집]사건이 발생한 지 9년이 지난 1969년에 마산시 구암동의 애기봉 일대에 1,200평으로 사건 당시 희생자의 묘역을 조성하여 이듬해 1월에 묘 13기를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이후 1994년 이곳을 성역화하는 사업을 추진하기로 한 뒤 1996년에 계획이 확정되면서 1998년 3월부터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2002년 7월 22일 마산시가 묘지 일대의 관리권을 국가보훈처로 이관하였고, 이후 8월 1일에 국립 묘지로 승격되었다.[10] 승격 이후 9월 11일에 국립 묘지 관리소가 설치되었고[11], 5년간의 공사 끝에 시위 43주년이 되는 날인 2003년 3월 15일에 준공식을 했다. 2010년 7월 1일 마산시와 창원시가 통합하여 행정구역상 창원시 마산회원구에 속하게 되었다.
기념일
[편집]2003년 12월 26일, 경상남도에서는 도 조례 3017호를 통해 매년 3월 15일을 기념일로 지정했다. 또한, 2009년에는 국회에서 국가기념일 제정 관련 법안이 통과되면서 2010년에 정식 공포되었다.
같이 보기
[편집]- 누나의 3월 - 3·15 의거를 소재로 하여 마산문화방송에서 2010년에 제작·방영한 특별기획 드라마이다.
- 이기붕
- 이승만
- 김주열
- 3.15 부정선거
- 4.19 혁명
- 자유당
- 광주 5.18 민주화 운동
각주
[편집]- ↑ 3ㆍ15 의거 기념일
- ↑ 경남CBS 최호영 기자 '마산 3.15의거' 국가기념일 지정…국무회의 통과[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노컷뉴스 2010년 3월 9일
- ↑ 마산시의 민주당~:연시중,《한국정당정치실록 2:6·25전쟁부터 장면 정권까지》(지와사랑, 2001), 233쪽.
- ↑ 민주당 의원 정남규를~:연시중,《한국정당정치실록 2:6·25전쟁부터 장면 정권까지》(지와사랑, 2001), 234쪽.
- ↑ 허윤수는 민주당으로~:정용욱,〈이승만 정권의 붕괴(3.15~4.26):이승만 정부의 대응 및 미국의 역할과 관련하여〉,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한국현대사의 재인식 4:1950년대 후반기의 한국사회와 이승만정부의 붕괴》(오름, 1998), 240쪽.
- ↑ 경찰의 발포로~:동아일보사,《민족과 더불어 80년:동아일보 1920~2000》(동아일보사, 2000) 340쪽.
- ↑ "3·15의거 광주서 시작"…민주주의 장송 데모 재현
- ↑ 이만섭, 〈이승만의 몰락,피플파워 현장:이만섭 전국회의장 회고 3·15마산의거〉《신동아》1995년 4월, 309쪽.
- ↑ 시류가 남긴 정치어록 - 동아일보 1976년 8월 14일
- ↑ 대통령령 제17668호
- ↑ 대통령령 17730호
외부 링크
[편집]- 국립 3·15 민주묘지 공식 홈페이지
- / 3·15 의거 기념사업회 공식 홈페이지 Archived 2014년 12월 20일 - 웨이백 머신
- 3ㆍ15마산시위(3ㆍ15의거)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